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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6

본문

요20:19-23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은신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천지 창조시에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처럼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에게 능력의 근원인 성령을 주시는 것을 상징적인 행동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을 창세기2:7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공동번역 성경에는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창세기2:7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흙의 원뜻은, '땅의 먼저'를 말하고 생기(히-네솨마)는 '생명의 호흡'(사2:22), '전능자의 기운'(욥33:4)을 의미합니다. 또 생령(히-네페쉬 하야, 生靈 - 날 생, 신령 령)은 '살아 있는 자', '영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에게 생령이 되었다'에서 생기는 생명의 본원(本源)을 뜻하고, 생령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실체). 이러한 영성(靈性)의 본질적 요소는, 흙(육체)에다가 하나님의 생기(영)을 불어 넣으므로 말미암아 진선미를 갖춘 불사성(不死性)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범죄하기 이전에 아담의 몸은 영생하는 피조물이었습니다. 몸의 실체는 물질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기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신령한 몸(영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만드신 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시24:4, 암3:7). 둘째로 하나님과 교통하심을 갖기 위해서입니다(잠3:32). 셋째로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기 위해서입니다(욥29:4).
이처럼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로 만든 생령입니다(겔18:4, 마10:28, 약5:20, 벧전1:9, 벧전4:19).

히브리 원어 '네페쉬하야'는 "생명 있는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이 짐승과 육축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창1:24). 짐승들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자라는 뜻이고, 사람은 영적 생명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는 말씀은,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생기를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잠언20:27에는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애가4:20에는, '기름 부으심'을 가리켜 '우리의 숨결(콧김)' 이라고 표현했고, 요한복음3:8에는 사람이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을 '바람'에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6:19-20에는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殿)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 참 성전 - 고전3:16, 딤전3:15, 엡2:21, 출29:45-46, 출25:8, 레26:11, 슥2:10, 고후6:16, 렘7:21-23).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라고 제자들의 마음에 평화를 축복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20:21)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저희를 향하여 숨을 후욱 내뿜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택한 성도들에게 말씀과 성령으로 '영적 생명'을 주시어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왜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했습니까?
아담, 하와가 범죄함으로 생기가 떠나고 산송장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6:3절 말씀에 나타나듯이 육체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씀을 공동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입김이 떠나면 곧바로 '육체'가 된다는 의미를 살려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뿜은 행위는 성령에 대한 상징적인 동작이었습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바람, 호흡, 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숨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에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행2:1-3) 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숨은, 제자들을 중생시켰고, 예수의 숨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탄생시켰고 예수의 숨은, 세계선교의 능력이 되었으며, 오늘도 예수의 숨을 받은 개인과 사회는 변혁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예수의 '숨', 곧 성령은 능력을 주시는 영입니다.
디모데후서1:7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선물로 주시는 성령)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근신(삼가할 謹, 삼갈 愼)은 삼가서 조심 함이요, 말과 행동을 삼가 함이요, 반성하여 조심 함이요, 자신을 지배하는 생활태도의 엄격함을 말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 이 세 가지를 '힘과 사랑과 절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과 권세를 받게 되며, 미워하던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게 되고, 자신을 말씀으로 지배하는 엄격한 통제, 곧 절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역사였습니다. 약한 제자들은 능력을 얻었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용기를 얻은 변화가 곧 성령 강림의 사실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내어 쫓는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안정과 평온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믿음의 평강, 사랑의 평강, 산 소망의 평강을 주셨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영육간 생명의 평강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도행전1:8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주신 후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눅4:14, 행4:33, 눅24:49, 살전1:5, 행10:38).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두려움이 도망갑니다. 천국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20:23 말씀대로 '말씀의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방의 사도인 바울이 들은 음성도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는 진리였습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약한 것을 도리어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곧 성령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고후12:9-10).
그렇습니다. 예수의 '숨'을 받는다는 것은, 곧 부활의 능력을 받아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고, 무능함을 권능과 능력으로 바꾸는 놀라운 힘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지성, 감정, 정신이 일정한 작용을 할 수 있는 힘(能)이요, 모든 것을 잘 감당해 내는 힘(力)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실 때, 사죄의 복음, 영생의 복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결코 빈손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언하시고 사도로 임직 선언하십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누구 죄든지 사죄하는 복음을 선언하였습니다(요20:19-23).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의 '숨' 곧 성령은 깨끗케 하는 영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을 얻는다"고 말하였습니다(고전6:11).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할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마3:11)"라고 했습니다. 곧 불로 상징된 성령은 불이 태우는 역할을 하듯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태어 깨끗케 한다는 뜻입니다.

세계에게 가장 건강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알라스카의 에스키모였다고 합니다. 에스키모는 춥지만 맑은 공기와 햇볕 속에서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도래와 함께 에스키모의 생활양식이 바뀌어졌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여 공기가 오염되었습니다.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부터 탁한 공기로 흐흡합니다. 그래서 지금 에스키모인들은 당뇨병, 심장질환 등에 시달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병 없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생활하는 환경의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숨을 쉬는 환경, 즉 공기가 얼마나 중합니까?
사람은 매일 18,925리터의 공기를 폐로 호흡한다고 합니다. 폐로 들어온 나쁜 공기는 혈관을 타고 곧바로 몸의 일부가 됩니다. 사람들은 음식물이 상하면 까다롭게 굴면서, 숨쉬는 공기가 나쁜 것에는 의외로 개의치 않습니다. 음식에 있는 독은 잘 배설되지만 호흡으로 들어온 독은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예전에는 없었던 폐암이 많아졌습니다.

성령을 숨(입김)으로, 공기로, 바람으로 상징한 것은 현대인들이 읽을 때 참으로 알기 쉽고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예수의 '숨', 예수의 '입김'은 오염된 심령을 깨끗케 하는 힘이 있고, 더러워진 마음을 정화하는 약효를 가진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숨'은 성결의 영입니다(롬1:4). 깨끗케 하시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의 '숨'을 받아야 합니다(행22:16, 출15:13, 롬1:4).

이처럼 성령은 거룩하고 깨끗한 진리의 영이요, 죄를 씻고 깨끗케 하시는 영입니다(히9:11-15, 10:9-25). 또한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영입니다(요14:26, 엡1:13-14, 고후1:22).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먼저 네 안을 깨끗이 하라"(마23:26, 시24:3-6), "죄인들아 손을 깨끗케 하라"(약4:8, 욥17:9)고 말씀하십니다(참고 - 시24:4, 73:1, 마5:8, 욥22:30, 시18:20, 24, 26:6, 욥9:30).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惡)한 생각(마9:4, 약2:4, 창6:5, 시56:5)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눅12:25, 9:47, 요2:24-25, 렘17:10, 시139:2, 요16:30, 히10:22).
저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는 문제입니다. 한없이 넓은 하늘을 가리켜, 우리는 "하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의 '하느님'은 '하늘님'의 줄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이 높고 광대한 하늘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저는 "하늘은 허파(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가장 먼저 접촉하는 하늘은 호흡을 통해 공기와 접촉하도록 되어 있고, 그 호흡은 허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나의 하늘은 나의 허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숨', 성령은 어디서부터 그 활동을 시작하십니까?
욕심으로 오염된 나의 마음에서, 위선의 탈을 쓴 더러운 허위의 현장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우리의 도둑 같은 마음에서 성령은 오늘도 여전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죄인, 곧 잃어버린 자를 끝까지 찾도록 찾아 가십니다(눅15:1-32, 마18:14, 눅19:1-10).

셋째로, 예수의 숨은 내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령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16-17 말씀을 공동번역을 보게 되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혜사(保惠師)는 보호할보(보증), 은혜 혜, 스승 사로서, 그 뜻은 도울 목적으로 '부르다, 권고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말은 헬라어 동사 '파라칼레오'에서 온 말인데, 명사로는 '변호사, 탄원자, 중보자, 상담자, 친구' 등을 가리킵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은 옛날 그리스 법정의 변호인입니다. 변호사처럼 돈 받고 일하는 전문직이 아니라 '파라클레토스'는 대부분 피고의 친구였습니다. 죄인을 변호하면 함께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희생을 각오하고, 친구의 무죄를 위하여 줄곧 곁에 앉아서, 힘이 되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변호해 주는 친구 중의 친구였습니다. 즉, 중보자입니다(참고 - 딤전2:5, 갈3:20, 히8:6, 9:15, 12:24, 6:17, 요일2:1).

예수는 부활 승천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든지 간구하면 이런 친구를 붙여 주겠다고 속하셨습니다(요15:13-15).

결론을 맺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바람 같고 불의 혀 같은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용감해지고, 자신이 생기고, 싱싱해지고, 의욕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보혜사' 곧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 친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행2: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최후로 남기신 약속의 말슴이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라는 말슴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화답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계22:20). "보혜사 성령이여, 예수의 '숨'이여, 나를 채워 주시옵소서. 아멘"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아라" 할 때에 "아멘"뿐입니다(요20:22-23).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할 때 하나님의 동역자(고후6:1)가 될 수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능력자(행1:8)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숨'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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