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3
1.
1685년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에 사는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집안에 여덟 번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버지 요한은 거리의 악사였기에 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며 자라난다. 아홉 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가난한 큰형의 집에 얹혀살며 음악 공부를 했으나 결국 스스로 먹고살 방법을 찾아 열네 살에 뤼네부르크로 간 그는 학비를 지원받으며 그곳 교회의 합창단원이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며 귀족이나 교회에 고용되어 일을 하였다. 그는 바이마르 궁정악단과 아르슈타트 교회, 성브라지우스 교회 등을 거치며 바이올린과 오르간 연주자로 일한다.
그는 1723년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 이 지역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쓰이는 음악을 만들고 합주단과 합창단을 지도하는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했고, 그 후 27년간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간다.
자녀를 스무 명이나 둔 그는 평생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궁정이나 교회에서 받는 월급만으로 그 많은 식구를 부양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궁핍한 환경에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음악가로서의 삶에 열중했다.
그는 평생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고 그 대부분이 종교음악이었다. 특히 교회 칸타타를 200여 곡이나 남겼는데 많은 곡을 작곡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음악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종교음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대위법이라는 기법을 완성하여 고전음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어떤 부귀와 영화도 누리지 못한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싸워야 했고, 그가 죽은 후 그의 작품을 담은 악보들은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싼값에 팔려나가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간다. 그가 바로 우리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바흐(Bach)다.
우리는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다. 음악을 창시한 사람이 아님에도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근대 서양음악의 발전에 가장 앞장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발전했던 고전파 음악의 바탕을 마련했으며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완성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저 가난한 음악가였을 뿐 어느 누구도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 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은 100년 뒤에 일어난다.
완전히 묻혀버릴 뻔했던 ‘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바로 멘델스존이었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포장하던 종이 다발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작, 마태가 전한 복음서에 의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곡’이라는 글귀를 보고 놀란 멘델스존은 그의 흩어진 악보들을 모았고 100년 동안 묻혀있던 이 곡을 연주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다. 바흐 음악의 진가를 발견한 멘델스존으로 인해 그는 재평가되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후대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우리는 ‘음악의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2.
1852년 스페인의 레우스에서 주물 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하게 자랐지만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17세에 바르셀로나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한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건축학을 공부한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의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학교생활을 가늠케 하는 말이다. 아마도 기존 건축 상식을 뛰어넘는 그의 작품들을 바라본 교수들의 평가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건축가로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 철 세공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세상이 몰라주던 천재는 구엘이라는 부자를 만나게 되고, 구엘이 자신의 재산을 그에게 투자하면서부터 천재성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한다. 1890년 이후 후반기 작품들을 통해 점차 그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하나의 생명력으로 재탄생하게 되고, 말 그대로 세계 건축사에 길이 남을 독특하고 역동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 창조된다. 그는 바로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이다.
1926년 6월 가우디는 전차에 치여 74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초라한 행색 탓에 부랑자로 오해받아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니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배려로 성자들만이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지하에 묻히게 되는데, 이 성당은 그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 감독을 맡은 로마 카톨릭의 성당 건축물이다.
가우디는 1883년 설계를 시작하여 이후 40여 년간 이 성당의 건축에 열정을 기울였으며 사망할 당시까지 일부만이 완성되었다. 이후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건축자금을 충당하여 공사가 진행되어 오다가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의 영향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1953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재개되었고 현재에도 건축은 진행 중이며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창성과 위대함은 이미 많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알려져 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작품이 40년 동안은 가우디가 직접 건축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제자들의 손을 통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아마도 가우디는 평생을 바친 자신의 역작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스페인의 후예들이 자랑스러울 것 같다.
3.
바흐에게는 멘델스존이라는 존재가 있었듯이, 가우디에게는 그의 제자와 후예들이 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연주하고 조각하고 세상에 알리고 궁극적으로 완성해가는 일은 남겨진 자들의 몫임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들에게 맡겨진 일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어떤 비난과 오해 속에서도 평생을 바쳐 기도하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노목회자의 빛나는 유작을 두 손에 받아든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하다.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급하지 않으면서도 끈질기게 이 일을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멘델스존이 되어 바흐의 곡을 세상에 알리고 싶고 가우디의 제자가 되어 그의 유작을 완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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