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5
essay122_body.jpg

그랬던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소위 말하는 미대 다닌 남자였다(이대 아니고 미대라고 그는 또 아재개그를 날렸다). 그는 그런 그의 타이틀이 나름 있어보인다며 은근히 만족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디자인 전공에 대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고 털어 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그런 그가 참 안쓰러웠다.  

“뭘 했다구요?” 

거의 반 이상은 다시 묻고 재차 확인 한다고 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체크하며 말이다. 

“근데 너 옷 입은게 왜 그 모양이니? 하하하!” 

솔직한 친구들도 간혹 있다고 했고 시원한 웃음소리는 어색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그 모양인데?’라고 말하지는 못했는데, 그러한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소심하다고 누차 에세이에서 밝혀왔다고도 했다. 

사실 그가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학 중 프랑스 자수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패션필드에 뛰어들었고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뜨개질과 정신건강과의 상관관계’라는 논문으로 동네 문화센터에서 일약 떠오르는 별로 주목을 받았다거나 했던 일도 더더욱 없다.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하고 취업하여 정글같은 의류업체에 근무하는 내내 그와 맞지 않을 뿐더러 외향적이고 자신의 장점과 매력을 항상 드러내야 하는 일의 성향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그는 학교 재학 중 내내 숱한 번민과 갈등,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는데 대부분은 밑바닥 수준의 형편없는 드로잉 실력 때문이었고 그로인해 오는 번민과 갈등은 편의점 싸구려 1+1 캔 커피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전공과목보다는 철학이나 비주얼 어널리시스(서양미술사 정도 되는 과목이었다), 사진 같은 보통 애들이 설렁설렁 하는 과목에 학구열을 불태웠고 학교에서 유명인사나 작가들을 초청하여 마련하는 특별 강연에는 열일 제쳐두고 참석했던 것 같다. 

전공과목 수업 얘기를 들어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바로 드로잉 펀더멘탈, 기초소묘 클래스라고 말 할 수 있겠다(과목이름은 모두 영어였다). 담당교수는 첫 수업 내내 그의 뒤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그 당시 아마도 심하게 버벅거리는 그의 뒤에서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열심히 앞, 뒤를 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만 두면 매월 연금이 나오나? 아니면 퇴직금으로 뭘 해야하나?’ 뭐 대충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던 97학번의 순진한 청년은 디지털디자인 과목 수업 첫날, 앞에 놓인 컴퓨터가 색깔이 너무 예쁘다고, 역시 우리학교는 다르다고 좋아했다고 했으나, 몇 번의 수업 이후로 그는 애플도 별거 아니라는 둥, 자신은 아직 아날로그 인간이고 어도비의 포토샵을 누가 쓰겠냐고 말하며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까지 애플사의 스마트 폰을 들고 다녔는데 퍽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수업이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며 졸고 있던 나를 깨웠는데 여기서는 조금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그가 무엇인가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첫 수업 때부터 자신을 위해 개설한 강의인 것 같았다며 그 이유는 바로 드로잉 스킬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컨셉추얼한 무언가에 더욱 높은 비중을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체 드로잉 컨셉이 무어냐고 내가 묻자, 그도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는데 대충 짐작컨대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 전위 음악 같은 곡을 듣고 느낀 바와 생각하는 바를 드로잉으로 표현하거나 하는 그러한 과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컨셉만 훌륭하면 드로잉 ‘따위’는 조금 수준이 떨어지거나 대충해도 문제없을 것이란 얄팍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첫 과제를 벽에 붙이고 자신의 그림 컨셉과 의도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크리틱(왠지 어감이 무서웠다)’과정에서 그는 ‘장황스러운’ 설명과 포장으로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고 그러한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는 점점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회심의 파이널 프로젝트, 기말과제가 주어졌고 준비과정에서 지도교수와의 면담이 잡혀있었는데, 보통 파이널 프로젝트의 방향과 작업진행계획들을 상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점수 비중이 높은 과제고 여름학기의 마지막 프로젝트라 그 역시 최선의 준비를 다하고 교수와 만났다고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며 잠시 말을 멈췄는데 교수가 불쑥 던진 그 말을 정확히 그대로 기억한다고 했다. 

“있잖아, 돌 하나를 제대로 그려봐. 그러면 거기서 컨셉이 절절 흘러 나오는 거야.” 

학생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며 존대를 해왔던 그 지도교수가 동네에서 좀 놀았던 형이 동생한테 내던지며 툭 말하는 듯, 그 말투에도 번뜩 정신이 들었었다고 말하며 면담은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마무리하고 서둘러 교수의 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럭저럭 파운데이션 과정을 마쳤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그 말이 아직도 그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제가 97학번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입니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과목이 어떠한 내용의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저는 또 어떠한 과제물을 제출했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그 이후에도 학년이 바뀌어 전공과목 수업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못 붙였습니다. 오로지 면담과정에서 지도교수가 제게 한 그한마디는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떠한 스킬보다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하며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까지 흘렀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던 그 순간의 감정과 교수의 말투와 어조, 단어 하나하나까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만큼 그의 한마디가 저의 안이한 태도와 생각, 나태함에 일격을 가한 까닭인 것 같습니다.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실력에 논리적으로도 빈약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가 무척 곤욕스러웠을 그때 그 지도교수와 그의 한마디가 유독 생각나는 이 밤, 올해 들어 처음 맞는 열대야로 뒤척이는 긴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에세이소개HCY.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175

#99.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_ 박승현 file

‘많아지면 달라진다’의 저자 클레이 셔키(Clay Shirky)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으로 연결된 전 세계 20억 명의 여가 시간을 합치면 약 1조 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 시간의 대부분을 TV를 시청하는데 낭비하였지만, 인터넷과 S...

 
2017-02-16 339
174

#94. 그래도, 희망! _ 홍미례 file

2016년이 떠납니다. 2016년은 이제 돌아오지 않습니다. 더불어 2016년 모든 시간은 2017년의 뒤로 숨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과거는 오늘의 자화상...

 
2017-01-08 368
173

#130. 바라봄의 기쁨 _ 서재원 file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화려함, 때로는 소박함, 그리고 보는 것으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눈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기관 중 하나 입니다. 하루라도 눈을 뜰 수 없다...

 
2017-10-10 374
172

#101. 시작이라는 선물 _ 서재원 file

어느덧 2017년 1월이 모두 지나고 2월의 중간에 도착했습니다. 2017년, 어떤 시작을 하셨나요? 저는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어느덧 20대가 되어 처음 보낸 지난 2016년, 그 모든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합니다. 돌아보니 2016...

 
2017-03-03 381
171

#136. 내가 여기에 서있는 이유 _ 하찬영 file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우연히 저는 ‘위플래시’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개봉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라 틀어놓고 있다가 결국에는 끝까지 보고야 말았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지금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아무래도 이제는 그...

 
2017-12-01 386
170

#105. 고3과 학부모를 위한 조언 _ 이원재 file

3월은 피곤한 달이다. 해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새로운 얼굴들을 보며 새로운 이름을 외워가며 그 아이들의 많은 것을 파악하려고 애쓰느라 시간에 쫓긴다. 보름이 지나도록 이름이 낯선 아이들, 그 티라도 내면 마음에 상처 입을까봐 수시로 사진을 ...

 
2017-03-30 396
169

#115. 우리 인생엔 지름길이 없다 _ 김영호 file

2017년 전도 축제가 5월 14일과 21일 양일간에 진행되었습니다. 바둑에는 복기란 말이 있습니다. 복기는 한 번 두고 난 바둑을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

 
2017-05-29 402
168

#106.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고찰 _ 강명선 file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한지 만 10년이 되었다. 이 본격적인이란 말은 교회에 나와서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기관에 등록하여 봉사하면서 정기적인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드린 신앙생활의 기간이며...

 
2017-03-30 415
»

#122. 학교에서 배운 한 가지 _ 하찬영 file

그랬던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소위 말하는 미대 다닌 남자였다(이대 아니고 미대라고 그는 또 아재개그를 날렸다). 그는 그런 그의 타이틀이 나름 있어보인다며 은근히 만족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디자인 전공에 대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

 
2017-08-09 415
166

#141. 12월에 시작하기 좋은 책읽기 _ 이원재 file

학교 현장은 한 학년을 마무리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2차 지필평가(예전에는 기말고사라고 했음)가 곧 시작하고 방학 전까지 각종 행사를 하면서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3 수험생은 포항 ...

 
2017-12-26 417
165

#97. 청년이 되는 습관을 기르자 _ 송인호 file

'뇌를 늙게 만드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신앙을 더욱 청년처럼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나눠보고자 한다. 1. 밤 9시 이후 식사하는 습관 – 잠잠히 기도하며 내일을 준비하자. 2. 험담하는 것 - 욕설이나 ...

 
2017-01-25 419
164

#85. 3대 영(靈)양소 _ 박승현 file

# 천고마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계절인데, 왜 내가 살이 찌고 있는지? 가을에는 식욕이 왕성해져 다이어트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식욕이 증가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적어져 기분 조절, 식욕, 수면 ...

 
2016-10-31 420
163

#110. 그래서 우리는 괜찮습니다 _ 정유진 file

요즘 나는 나를 배웁니다.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좋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질 때, 어떤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 새로운 나를 경험합니다. 물론 오랜 시간 반복되는 생활습관과 행동, 생각의 패턴들도 내가 누군지 설명합니다. 나 자신...

 
2017-04-25 425
162

#113. 할머니니? _ 박승현 file

“할머니니?” 5월 초 황금연휴를 맞아 중학생인 아들은 단기방학이었다. 방학은 그냥 놀도록 놔두어야 하는 것인데, 학교에서는 무슨 과제를 주는지(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이 노는 꼴을 못 보는 듯). 그리고 아직까지 일부 과제는 부모의 몫이다. ...

 
2017-05-29 425
161

#56. 책이 지니는 세 가지 몫 _ 홍미례 file

책은 세 가지 몫을 가집니다. 저자의 몫과 독자의 몫,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책이 지니는 몫은 트라이앵글의 구조를 이룹니다. 책은 다양한 텍스트들의 총집합인데 그중에는 유일한 텍스트도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렇습...

 
2016-04-04 444
160

#88. 잊지 말고 기록하자 _ 이장식 file

기억합니다. 그러나 잊고 살고 있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과 결심들, 부모님에 대한 소중함, 친구와의 우정, 하나님의 은혜 쉽게 잊고 살고 있습니다. 2010년 초겨울이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고 미국 생활 2...

 
2016-11-27 445
159

#116. 기회 _ 서재원 file

어느덧 우리는 2017년이라는 층의 중앙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우리가 2017년을 만났을 때 세웠던 계획들과 수많은 목표들에 얼마나 다가가고 있으신가요? 아직도 계획만, 혹은 포기한 것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계획...

 
2017-06-12 446
158

#89. 엄마 손은 약손 _ 지근욱 file

내가 어릴 적이라고 해봐야 1970년대, 그리 옛날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약이 증상별, 종류별, 메이커별로 다양하지도 흔하지도 않았다. 요즘처럼 밤에 아이가 아프면 자가용에 태워 가까운 응급실에 가던 시절도 아니다. 열이 오...

 
2016-11-27 448
157

#149. 나와 당신의 슈퍼 히어로 file

‘2030 청년세대 15만 명이 직접 선정한 영웅들이 직접 멘토링을 한다’는 내용의 종편방송 커머셜을 호기심 기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쟁쟁한 인물(‘영웅’들이라 해야겠습니다만)들이 출연하는 포럼에서 그들의 성공스토리를 공유하고 피와 살이 되는...

 
2018-02-14 451
156

#148.'그뤠잇!' or '스튜핏!' file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세상이다. 대통령뿐인가?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자신을 따르는 계층을 지배하는 존재는 다양하다. 아이들에게 뽀통령이라 불리는 ‘뽀로로’가 있다. 요즘 초통령(초등학생 대통령)은 ‘워너원’,...

 
2018-02-14 452
PYUNGKANG NEWS
교회일정표
2024 . 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찬양 HYMNS OF PRAISE
영상 PYUNGKANG MOVIE
152-896 서울시 구로구 오류로 8라길 50 평강제일교회 TEL.02.2625.1441
Copyright ⓒ2001-2015 pyungkang.com. All rights reserved. Pyungkang Cheil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