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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소위 말하는 미대 다닌 남자였다(이대 아니고 미대라고 그는 또 아재개그를 날렸다). 그는 그런 그의 타이틀이 나름 있어보인다며 은근히 만족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디자인 전공에 대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고 털어 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그런 그가 참 안쓰러웠다.  

“뭘 했다구요?” 

거의 반 이상은 다시 묻고 재차 확인 한다고 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체크하며 말이다. 

“근데 너 옷 입은게 왜 그 모양이니? 하하하!” 

솔직한 친구들도 간혹 있다고 했고 시원한 웃음소리는 어색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그 모양인데?’라고 말하지는 못했는데, 그러한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소심하다고 누차 에세이에서 밝혀왔다고도 했다. 

사실 그가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학 중 프랑스 자수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패션필드에 뛰어들었고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뜨개질과 정신건강과의 상관관계’라는 논문으로 동네 문화센터에서 일약 떠오르는 별로 주목을 받았다거나 했던 일도 더더욱 없다.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하고 취업하여 정글같은 의류업체에 근무하는 내내 그와 맞지 않을 뿐더러 외향적이고 자신의 장점과 매력을 항상 드러내야 하는 일의 성향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그는 학교 재학 중 내내 숱한 번민과 갈등,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는데 대부분은 밑바닥 수준의 형편없는 드로잉 실력 때문이었고 그로인해 오는 번민과 갈등은 편의점 싸구려 1+1 캔 커피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전공과목보다는 철학이나 비주얼 어널리시스(서양미술사 정도 되는 과목이었다), 사진 같은 보통 애들이 설렁설렁 하는 과목에 학구열을 불태웠고 학교에서 유명인사나 작가들을 초청하여 마련하는 특별 강연에는 열일 제쳐두고 참석했던 것 같다. 

전공과목 수업 얘기를 들어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바로 드로잉 펀더멘탈, 기초소묘 클래스라고 말 할 수 있겠다(과목이름은 모두 영어였다). 담당교수는 첫 수업 내내 그의 뒤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그 당시 아마도 심하게 버벅거리는 그의 뒤에서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열심히 앞, 뒤를 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만 두면 매월 연금이 나오나? 아니면 퇴직금으로 뭘 해야하나?’ 뭐 대충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던 97학번의 순진한 청년은 디지털디자인 과목 수업 첫날, 앞에 놓인 컴퓨터가 색깔이 너무 예쁘다고, 역시 우리학교는 다르다고 좋아했다고 했으나, 몇 번의 수업 이후로 그는 애플도 별거 아니라는 둥, 자신은 아직 아날로그 인간이고 어도비의 포토샵을 누가 쓰겠냐고 말하며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까지 애플사의 스마트 폰을 들고 다녔는데 퍽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수업이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며 졸고 있던 나를 깨웠는데 여기서는 조금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그가 무엇인가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첫 수업 때부터 자신을 위해 개설한 강의인 것 같았다며 그 이유는 바로 드로잉 스킬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컨셉추얼한 무언가에 더욱 높은 비중을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체 드로잉 컨셉이 무어냐고 내가 묻자, 그도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는데 대충 짐작컨대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 전위 음악 같은 곡을 듣고 느낀 바와 생각하는 바를 드로잉으로 표현하거나 하는 그러한 과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컨셉만 훌륭하면 드로잉 ‘따위’는 조금 수준이 떨어지거나 대충해도 문제없을 것이란 얄팍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첫 과제를 벽에 붙이고 자신의 그림 컨셉과 의도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크리틱(왠지 어감이 무서웠다)’과정에서 그는 ‘장황스러운’ 설명과 포장으로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고 그러한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는 점점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회심의 파이널 프로젝트, 기말과제가 주어졌고 준비과정에서 지도교수와의 면담이 잡혀있었는데, 보통 파이널 프로젝트의 방향과 작업진행계획들을 상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점수 비중이 높은 과제고 여름학기의 마지막 프로젝트라 그 역시 최선의 준비를 다하고 교수와 만났다고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며 잠시 말을 멈췄는데 교수가 불쑥 던진 그 말을 정확히 그대로 기억한다고 했다. 

“있잖아, 돌 하나를 제대로 그려봐. 그러면 거기서 컨셉이 절절 흘러 나오는 거야.” 

학생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며 존대를 해왔던 그 지도교수가 동네에서 좀 놀았던 형이 동생한테 내던지며 툭 말하는 듯, 그 말투에도 번뜩 정신이 들었었다고 말하며 면담은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마무리하고 서둘러 교수의 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럭저럭 파운데이션 과정을 마쳤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그 말이 아직도 그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제가 97학번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입니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과목이 어떠한 내용의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저는 또 어떠한 과제물을 제출했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그 이후에도 학년이 바뀌어 전공과목 수업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못 붙였습니다. 오로지 면담과정에서 지도교수가 제게 한 그한마디는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떠한 스킬보다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하며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까지 흘렀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던 그 순간의 감정과 교수의 말투와 어조, 단어 하나하나까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만큼 그의 한마디가 저의 안이한 태도와 생각, 나태함에 일격을 가한 까닭인 것 같습니다.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실력에 논리적으로도 빈약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가 무척 곤욕스러웠을 그때 그 지도교수와 그의 한마디가 유독 생각나는 이 밤, 올해 들어 처음 맞는 열대야로 뒤척이는 긴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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