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간 열지 않음

글 수 181
등록일

2015.09.06

untitled.png

녀석을 발견한 것은 교회 에담 식당 앞 주차장 부근이었다. 감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있던 그 녀석. 그 작고 앙증맞은 녀석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발걸음을 멈췄다.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그 철없는 녀석이 아직은 깨끗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어쩌라고. 아... 어쩌라고.' 작은 탄식이 나온다. '어쩌다가 떨어진 거니. 아버지 곁에 딱 붙어 있었어야지.' 그 작고 매끈한 초록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직 나무에 바짝 붙어있는 다른 초록 꼬마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희는 주먹 꽉 쥐고 붙어 있어야 해, 가을이 올 때까지.' 걱정과 두려운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마지막 잎새를 그려 준 화가처럼 떨어진 그 녀석을 다시 붙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바짝 붙어있지 않으면 떨어질 수 있다. 올여름을 잘 버텨야 한다. 나의 여름은 그렇게 작은 긴장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그리고 이어진 여주 하계 대성회 '황금종을 울려라' 성경퀴즈대회 출전. 구속사 시리즈가 출간된 이후 매번 황금종 대회에 출전했기에 나에게는 익숙한 준비기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모습은 왜 이렇게 낯선지. 스스로 신앙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바짝 붙어서 살아있는 성도가 되고 싶었다. 이러다가는 내가 그 녀석처럼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출전한 거였는데, 나는 구속사 시리즈 예상 문제지를 앞에 두고 '이런 지엽적인 문제는 안 나와. 이건 전에 나왔던 문제야. 아... 이것까지 다 까먹은 거야?'라며 혼자 분노했다가 투덜거렸다가 책을 덮고 도망가기를 반복하며 동네 카페를 전전했다. 당시 기도제목은 '산 자'로 그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문제를 몇 번까지 맞추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 대회 당일, 나는 3번 문제에서 떨어졌다. 이게 웬일인가. 답이 무드셀라와 에녹인데 나는 에녹을 빼먹은 채 당당하게 답안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너무도 빨리 대기석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부활의 때까지 남아있는, '잠들어있는 자들의 자리'였다. 그곳에서도 문제를 계속 풀었다. 이미 탈락했는데 문제를 왜 푸느냐고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도 주변에는 나처럼 그 자리에서 같이 문제를 푸는 분들이 제법 있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곳이 고립된 곳임을 깨달았다. 이상했다. 바로 옆 무대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 살아남은 선수들의 긴장감, 그리고 앞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관중들의 흥겨움 속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들어있는 자들'이었다. 대회 중간중간 문제풀이도 있고 축하공연도 있었기에, 패자부활전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점점 살고 싶어졌다. 드디어 패자부활전의 문제가 나왔다. 듣는 순간 답을 알았는데 생각이 안 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거긴 내가 결혼한 성전 이름인데. 부활을 향한 초조한 카운트다운 가운데 나는 역대열왕가를 되뇌었다. 그리고 겨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산자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살아있다는 거구나. 부활보다는 변화가 천 배 좋다. 에녹 문제에서 떨어진 이유가 있었다.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시 115:17)

여름은 뜨거워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하고, 익어야 한다. 초록이 붉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그래야 살 수 있다. 땅에 떨어지면 구속사의 진행과 완성과 성취의 순간에 함께 기뻐할 수 없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올여름은 나에게 바짝 붙어 있으라고 당부를 하고 떠나간다. 고마워 여름아. 안녕!


95c2b5acfa5637bf80981beefe30d17c_TaRLTXVhQGHJyIVu14fsWx8fFQl.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161

[참평안_인터뷰] “구속사 시리즈 전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_게리 챔벌린 국제 CLC 신임 대표 file

“구속사 시리즈 전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게리 챔벌린 국제 CLC 신임 대표 세계적인 기독교 도서 출판, 보급 기구인 기독교문서선교회(Christian Literature Crusade, 이하 ‘CLC’)의 신임 국제 대표로 게리 챔벌린(Gary Chamberlin)이 지난 10월 29일 선...

 
160

#97. 청년이 되는 습관을 기르자 _ 송인호 file

'뇌를 늙게 만드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신앙을 더욱 청년처럼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나눠보고자 한다. 1. 밤 9시 이후 식사하는 습관 – 잠잠히 기도하며 내일을 준비하자. 2. 험담하는 것 - 욕설이나 ...

 
159

#81. 사랑에 대하여 _ 홍미례 file

사랑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잡았다고 해서 이 글 속에 뭔가 거창한, 혹은 뜨거운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썼던 글 중에 이 글이 가장 무심하고 냉랭한 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나는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고 ...

 
158

#46. 3일마다 가스불에 앉기 _ 지근욱 file

1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 차에서 원로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는다. 설교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 비유가 있다. 예전에는 '또 저 말씀하시는구나...' 하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지금은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아래 말씀은 그중 하나다. "죄...

 
157

#85. 3대 영(靈)양소 _ 박승현 file

# 천고마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계절인데, 왜 내가 살이 찌고 있는지? 가을에는 식욕이 왕성해져 다이어트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식욕이 증가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적어져 기분 조절, 식욕, 수면 ...

 
156

#127. 인생 2막을 시작하며 file

2017년, 어느덧 입추와 처서를 맞이하고 이제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기다리는 때가 되었다. 올 해 벌써 많은 일들을 겪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에 헉! 하고 놀랄만한 사건은 바로 곧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어린것...

 
155

#89. 엄마 손은 약손 _ 지근욱 file

내가 어릴 적이라고 해봐야 1970년대, 그리 옛날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약이 증상별, 종류별, 메이커별로 다양하지도 흔하지도 않았다. 요즘처럼 밤에 아이가 아프면 자가용에 태워 가까운 응급실에 가던 시절도 아니다. 열이 오...

 
154

#88. 잊지 말고 기록하자 _ 이장식 file

기억합니다. 그러나 잊고 살고 있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과 결심들, 부모님에 대한 소중함, 친구와의 우정, 하나님의 은혜 쉽게 잊고 살고 있습니다. 2010년 초겨울이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고 미국 생활 2...

 
153

#149. 나와 당신의 슈퍼 히어로 file

‘2030 청년세대 15만 명이 직접 선정한 영웅들이 직접 멘토링을 한다’는 내용의 종편방송 커머셜을 호기심 기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쟁쟁한 인물(‘영웅’들이라 해야겠습니다만)들이 출연하는 포럼에서 그들의 성공스토리를 공유하고 피와 살이 되는...

 
152

#110. 그래서 우리는 괜찮습니다 _ 정유진 file

요즘 나는 나를 배웁니다.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좋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질 때, 어떤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 새로운 나를 경험합니다. 물론 오랜 시간 반복되는 생활습관과 행동, 생각의 패턴들도 내가 누군지 설명합니다. 나 자신...

 
151

#78. 신은 죽었다고? _ 강명선 file

쌀쌀한 여름밤이었다. 아들과 나는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을 향해 걷던 길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나는 4학년 2 학기를 맞은 아들에게 새 학기에 대한 격려와 칭찬의 말을 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엄마, 나는 못생겼어. 나는 ...

 
150

#125. 노래하는 말 _ 송인호 file

죄를 짓고 붙잡혀 왕이 내리는 처벌을 받을 운명에 처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이 죄수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면 1년 안에 왕이 아끼는 말에게 노래를 가르치겠다는 약속으로 왕을 설득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

 
149

[참평안_에세이] ‘참 평강의 어르신’ 안성억 목사님_고재분 전도사 file

‘참 평강의 어르신’ 안성억 목사님 _고재분 전도사_ 안성억 목사님은 1976년에 평강제일교회에 등록하셨고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나는 그분을 뵐 때마다 그리고 소천하신 그분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지금도, 언제나 ‘평강’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

 
148

[참평안_인터뷰] 휘선을 기념하는 사람들(6) file

휘선暉宣을 기념하는 사람들 박중광 장로 #수문장 #대통령_경호관 #진짜_사나이 #이는_닦고_왔니 #복장_검열관 2021년은 평강제일교회 설립자이자 구속사 시리즈 저자인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님의 천국 입성 7주년이다. ‘참평안’은 자신의 삶으로 휘선을 ...

 
147

#104.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는 사람 _ 박남선 file

얼어붙었던 하늘과 땅이 어느새 온기를 만나 봄의 길과 마주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삶도 항상 따뜻한 날들만 가득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혹한의 겨울을, 서늘한 가을을 또 뜨거운 여름과 온화한 봄을 느끼곤 합니다. 통상 우리...

 
146

#38. 인재의 기준 _ 김태훈 file

"정규직, 주 5일 근무, 4대 보험, 연차휴가" 구직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채용정보 사이트의 내용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는 일반적인 조건이고 더 괜찮다 싶은 회사는 리스트가 길어진다. 건강검진, 가족보험, 사내 동호회, 회사 ...

 
145

#113. 할머니니? _ 박승현 file

“할머니니?” 5월 초 황금연휴를 맞아 중학생인 아들은 단기방학이었다. 방학은 그냥 놀도록 놔두어야 하는 것인데, 학교에서는 무슨 과제를 주는지(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이 노는 꼴을 못 보는 듯). 그리고 아직까지 일부 과제는 부모의 몫이다. ...

 
144

#71. 사드 단상 _ 송인호 file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라면, 7월 역시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 지 63주년이 되는 달이다. 전쟁 통에 태어나거나, 해방 전후 태어난 분들도 이제 어언 70대에 도달하셨고 헤어진 이산가족들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나라사랑 웅변대...

 
143

#103. 사순절 그리고 갱신 _ 이장식 file

날씨가 풀리고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니 그제야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엄동설한 얼어붙었던 대지는 녹고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든 만물이 눈을 뜨고 기...

 
142

#141. 12월에 시작하기 좋은 책읽기 _ 이원재 file

학교 현장은 한 학년을 마무리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2차 지필평가(예전에는 기말고사라고 했음)가 곧 시작하고 방학 전까지 각종 행사를 하면서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3 수험생은 포항 ...

 
08345 서울시 구로구 오류로 8라길 50 평강제일교회 TEL.02.2625.1441
Copyright ⓒ2001-2015 pyungkang.com. All rights reserved. Pyungkang Cheil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