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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드] 1995년판이 집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렇다 못해 아주 진한 갈색 페이지들과 광택은 이미 온데간데없는 탁한 표지였다. 책을 펼치면 딱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고 군데군데 얼룩도 져있다. 문체도 가령 '왠지'가 아니라 '웬지'로 적혀있고 외래어를 표기하는 방식도 다른 글자들이 페이지 곳곳에 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난 이런 걸 엄청 좋아한다. 4차 산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아직도 컴퓨터보다 종이가 더 익숙하고 정감이 간다.

  

그림이나 글도 컴퓨터보다는 종이에 작업하는 걸 더 좋아한다. 인위적이고 쨍하다 못해 깨질 것 같은 느낌보다는 편안해서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글도 화려한 미사여구가 있는 것보단 담백한 문체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좋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드]에서 하루키가 하코다테에서 기차를 타고 삿포로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옆자리에 있는 아저씨가 식사로 카레를 주문해서 먹는 장면이 있다. 하루키는 그때 카레라이스를 남이 먹고 있으면 무척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별거 아닌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맞아 카레는 남이 먹으면 더 맛있어 보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말은 좋은데 정작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순간은 적은 것 같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심지어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늘 긴장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긴장을 유지해야 편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떠한 역할이 있고 맡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가 지는 무거운 짐을 다 맡기라고 하셨지만 나는 아직 부족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맡기는 건 여전히 어렵다. 부담스럽고 지치게 하는 일이 계속될 때마다 잠시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원하게 된다. 꼭 놀거나 하고 싶은 일을 안 해도 되니 그저 '쉬는'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저 구절이 맘에 와닿았나보다. 기차 칸에 있는 아저씨의 카레라이스를 보면서 남이 먹으면 더 맛있어 보이는 카레라이스를 생각하는 그 순간의 여유가 나는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지 못해서 자연스러운 것을 더 좋아하는 나는 적어도 혼자서는 그런 여유를 얻기는 힘들 거 같으니 조금이나마 하나님한테 짐을 좀 맡겨서 여유를 얻는 연습을 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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