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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년 니케아 공의회의 칙령은 화가의 의무를 엄격히 제한했다. 스투디온의 테오도로스의 주장이다.

'그림을 창조하는 일은 화가의 창안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비롯해야 한다. 화가는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있어서 기술적인 측면, 곧 '테그네'를 생산할 뿐이다.'

니케아의 금지 규정은 화가가 종교화의 내용을 임의로 구상하거나 새로운 소재를 지어내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안료를 갈고 붓질하는 일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베이더는 니케아의 권위에 도전한다. 그가 그린<성모를 그리는 누가>는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 화가로 직업을 바꾼 누가가 처음 등장하는 그림이다. '누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그림그리는 누가'가 베이더의 관심이었다.

베이더는 누가를 성모와 함께 나란히 세워 둠으로써 새로운 주제 영역을 개척했다. 성모를 현실의 역사적 공간에 위치시키고, 그림 속의 누가에게 화가의 역할을 맡겨서 성스러운 그림을 창조하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문제를 체험 가능한 현실 영역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성모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젖을 물리는 마리아, '곧 '마리아 락탄스'는 애당초 이집트의 산물이다. 호루스 에게 젖을 빨리는 이시스가 도상 형성의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천국가는길을 인도하는 '마리아 호데게트리아'에서'마리아 락탄스'로 세속화한 모정은 스스럼없이 젖가슴을 드러낸다.

성모는 남의 이목을 아랑곳 하지 않는 범용한 아낙네가 되었다. 종교화에서 풍속화의 주인공으로 건너뛴 마리아는 머리 두건은 고사하고 후광조차 벗어던졌다.

▶ 로히르 반 더 베이더,<성모의 초상을 그리는 누가>, 1405년 무렵, 138x110cm,뮌헨 고전회화관,뮌헨

원경의 풍경은 좌우가 다르다. 오른쪽이 성곽과 수도원의 인적 없는 풍경이라면, 왼쪽은 활기찬 도시의 숨쉬는 거리를 재현한다. 집집마다 빨래가 펄럭거리고 상거래가 활기차게 이루어지는 노변 상점에는 자유의 바람이 분다. 예배로 초대하는 교회 종소리 대신 시청 머리의 시계 바늘이 시민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근대적 풍경이다. 누가는 성모자와 마주앉았다. 베이더는 그림양쪽으로 주인공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도상을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쳐녀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보았을 것이다. 혹은 성모자 앞에서 무릎 꿇고 서원하는 주문자의 도상 유형을 차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 안쪽의 전망이 활짝 열린 그런 공간은 비교할 만한 다른 종교 도상이 없다. 누가의 뒤편으로 다른 방이 엿보인다. 그곳에 펼쳐 둔 성서와 그 아래 웅크린 황소는 복음서 기자 누가의 상징 물이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다. 오른손으로 강보에 누운 아기를 끌어 안고 오른쪽 젖을 내미는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보는 이의 편의를 위해서 그쯤은 감수할 수 있다. 뒷벽과 천장에 보로카트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천개를 드리웠으나 동방 미술에서 가져온 옥좌는 간데없다. 투박한 나무의자에 방석 두 장을 깔아 둔 것이 고작이다. 이것도 신성의 마리아보다 모성의 마리아에게 잘 어울린다. 의자 뒤쪽 기둥머리 장식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형상이 새겨졌다. 인류의 어버이가 지은 구약의 구속을 신약의 성모자가 풀어 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신성의 낌새가 전혀 없다. 천상의 광휘를 뿜어내는 만돌라도, 금빛으로 빛나는 구름도, 시중드는 천사도 없다. 성모자는 어디에서 이처럼 불현듯 나타난 걸까?

▶ 로히르 반 더 베이더,<성모의 초상을 그리는 누가>의 부분 그림, 1405년 무렵, 뮌헨 고전회화관,뮌헨

누가도 방석을 받치고 앉아 있다. 허리춤에 깃털 펜이 들어 있는 필통과 잉크병을 매달고 있다. 옆에 붙은 방에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가 성모자의 예고 없는 출현에 달려와서 그림 채비를 서둘렀다. 나무 받침대에 종이를 올려 두고 잰 손길로 펜을 굴린다. 사실 누가가 쥔 것은 펜이 아니라 청동이나 황동으로 만든 자루끄트머리에 은을 뾰족하게 녹여 붙인 은필이다. 종이도 그냥 종이가 아니라 석회가루 또는 골분을 곱게 빻은 뒤 아교나 고무풀에 섞어 엉기게 한 것을 얇게 발라서 바닥을 처리한 소묘용 종이다. 여기에 은필을 긁으면 산화 작용이 일어나서 깉은 갈색이 우러난다. 누가는 마리아의 얼굴을 큼직하게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는 성모의 상반신을 그리기에도 모자랄 것이다.

누가는 붓 대신 은필을 잡았다. 소묘는 간편하고 용이한 드로잉 구도여서 언제 어디서나 눈앞을 스치는 대상이나 소재를 재빨리 포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템페라나 유화는 안료와 패널을 준비하는 과정이 몹시 번거롭고 작업속도가 비길 데 없이 느리다. 환영처럼 나타난 성모자를 손 빠르게 그려 내기에 붓으로 그리는 패널 그림은 곤란했을 것이다.

누가가 소묘로 그릴 이유가 또 있다. 1357년 무렵에 나온<로마의 기적들>에 누가가 성모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는데, 누가가 다급히 윤곽선 몇가닥을 얼추 추스리자 마리아가 직접 손을 내밀어 나머지 부분들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그릴 수 없는 그림, 곧 '아케이로포이에토스'의 개념이 이콘의 전통을 거쳐서 네덜란드 화가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런 사례는 또 있다. 예컨대 성 갈렌의 투오틸로가 마리아 조각을 새기는데, 성모가 친히 조각가의 일손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같은 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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