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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리티우스는 렘브란트의 구성을 그대로 빌렸다. 동굴 무덤의 배경을 어둡게 처리하고, 나사로가 누운 석관의 뚜겅 위에 예수가 올라서 있는 것은 스승의 예술에 대한 무거운 존경의 표시이다. 다만 나사로의 발치에 서 있던 예수가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창백한 나사로처럼 파브리티우스의 나사로에게도 죽음의 퀴퀴한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젖혀 둔 석관 뚜껑에 예수가 올라섰다. 나사로의 머리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예수의 두 발 사이에 놓였다. 깨우는 이와 깨어난 이가 부활 기적의 세로축을 이룬다. 예수와 나사로의 머리를 연결하면 구성의 축은 화면 안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오른쪽 구석에 앉은 이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코를 감싸쥐고 있다.

예수가 팔을 들어올리자 나사로가 상체를 일으킨다. 죽은 자가 눈을 떴다. 렘브란트의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에 이끌렸으나, 파브리티우스의 나사로는 예수가 죽음의 영토에 던져 넣은 생명의 빛에서 기운을 얻었다.

죽은 자의 눈이 열리는 순간, 석관을 에워싼 구경꾼들 사이에 격렬한 술렁임이 일어난다. 놀람과 동요의 감정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파브리티우스는 구경꾼들의 반사 행동이 유발하는 감정의 파도를 화면의 구성 축을 따라서 조심스레 비틀어 놓았다. 예수의 외침과 손짓에 나사로가 깨어났다.

어두운 동굴 무덤 한복판에서 시작된 예수의 외침과 손짓 하나가 주변으로 흩어지면서 감정의 파고는 증폭된다. 그러나 눈부신 빛의 세례 가운데 누운 나사로의 영혼은 얼마나 고독한가.

 

렘브란트와 파브리티우스는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그렸다. 그러나 두 누이가 예수에게 간청하고, 예수가 시중꾼을 시켜서 무덤 돌을 치우게 하고, 죽은 자가 걸쳤던 수의를 벗기게 하는 장면은 그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성서 학자들이 이런 장면들을 두고 죽은 이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고 하는 간구, 죄악에 대한 참회와 고백, 그리고 사도들에 대한 신적 권능의 위임으로 풀이하고, 신교에 대해서 바티칸의 종교 정책을 정당화하는 빌미로 보았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나사로의 부활'은 인간의 절대적 무력을 상징한다. 신적 존재의 발 아래 누운 인간은 죄악과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직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적 구원에 이른다는 칼뱅 교회의 가르침이 빛과 어두움으로 우의화한 삶과 죽음, 또는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빗대는 종교화의 교훈에 스며들었다. 인간은 제힘으로 관 뚜껑을 열 수 없으며, 신성의 도움 없이 죽은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교훈이다.

▶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나사로의 부활>,1642년 무렵,

210.5x140cm,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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