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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식탁의 중앙을 점유하고 가장자리에 두 제자가 앉아 있는 대칭 구성은 엠마오 주제를 다루는 근대 이탈리아 미술에서 거의 예외없이 적용된다. 카라바조는 초록 상의를 입은 제자를 식탁 왼쪽 귀퉁이로 옮겨 두었다. 등장인물을 통해서 보는 이의 시점을 대신했다. 수염과 후광이 없는 젊은 예수는 영광과 권위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굳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예사로운 젊은이의 모습이다.

▶ 카라바조,<엠마오의 저녁 식사>, 1601-1602년, 141x196.2cm,국립 미술관, 런던

그의 왼손이 빵 위에 놓였다. 감사 기도를 드리려고 오른 손을 드는 순간 제자들의 눈이 열렸다. 카라바조는 제자들의 닫혔던 눈이 열리는 기적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빵을 나눈 뒤 들어올린 손바닥에 못 자국을 새겨 두었다. 식탁 오른쪽에 앉은 제자는 못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의 표정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제자들의 반응은 고요 할 수 없다. 양팔을 펴서 가로로 벌린 제자의 자세는 의혹과 경악을 드러낸다. 십자가에 달린 이의 자세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오른쪽 제자의 두 팔은 바로크 시대에 그려진 가장 역동적인 단축법을 보인다. 또, 회화적 공간을 폭력적으로 검거하는 붓의 위험한 도전이다. 나아가서 보는 이를 그림 안의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거역할수 없는 초대의 손짓이다.

프란체스코 스카넬리는 한 세대 후에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고 오른쪽 제자의 자세를 '전율스런 자유주의'라고 기록한다. 그의 왼쪽 가슴에 달린 조개 껍질은 순례자의 표식이다. 여관 주인은 조개껍질을 보고 문을 열었을 것이다.

여관 주인이 말없이 서있다. 광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우연히 던지는 그림자는 후광이 결핍된 예수에게 시각적 탄력을 실어준다. 자연주의 미술에서 그림자가 이처럼 무거운 가치를 지녔던 적은 드물었다. 그림자를 등 뒤로 밀어내고 그림 중앙에 자리잡은 예수의 모습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실존적 도상이다. 한편 제자들의 두 가지 반사 행동은 닫힌 눈이 열리는 시각적 각성의 두 단계를 암시한다. 식탁 끄트머리에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다. 과피가 갈라진 석류는 면류관의 고통과 수난의 의미로 읽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부활과 불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과와 무화가는 원죄를 일깨우고, 포도송이는 성찬식의 기적을 이야기 한다. 17세기 후반 벨로리는 식탁 과일들이 부활절 전후에 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물화 전통에서는 드물지 않은 재현이다. 기독교의 문법으로 읽는다면 식탁 정물은 사철 과일이 풍성한 낙원의 비밀을 이야기 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구원과 희망이 소담스런 과일의 형상으로 바구니에 담겨 있다.

 

▶ 카라바조,<엠마오의 저녁 식사>, 1601-1602년, 국립 미술관,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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