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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시날 지방 한 들판에 거대한 탑이 솟았다. 창11장이 전하는 이야기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 역청을 발라서 구름을 휘젓고 하늘을 호령하는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과 신에 대한 도전은 어리석은 와해의 신화가 되었다. 바벨탑의 비극적 신화가 되었다.

화가들이 상상하는 바벨탑은 복수하는 하나님이 스스로 팔을 휘두르거나, 천사나 바람을 시켜서 또는 하늘에서 뉘우를 퍼부어서 무너뜨린다. 이때 바벨탑을 짓던 인부들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침묵하며, 개미떠처럼 흩어지는 인간들을 네 방향으로 무리 지어 사라기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바벨탑은 사각형과 다각형 건축이 제일 흔하고, 12세기 중반께 원형 탑의 형식이 나타난다. 대개 6-7층으로 지어지다가 원형건축의 바깥 허리를 따라서 오르내리는 길을 달팽이 껍질처럼 나선형으로 낸 새로운 탑의 모습이 14세기 말 프랑스 채식 필사본에서 선보인다. 브뤼겔은 거대한 건축을 작은 그림에 가두었다. 그러나 다른 그림들을 비추어서 볼때 세로 높이 1미터가 넘는 브뤼겔의 그림은 차라리 큰 편이다. 대부분 네덜란드 화가들은 손바닥한 동판에다 극세필로 바벨탑의 위용담기 좋아했다. 바벨탑이 대개 손바닥 한 뼘 보다 높지 않고, 자재를 나르는 인부들을 좁쌀보다 작게 그려졌다. 바벨탑은 회화적 비례의 위력을 실험할 수 있는 주제로 인기를 끌었다. 세릴 화가들은 고대화가 티만테스가 조그마한 패널에다가 거인 키클롭스와 난쟁이 사튀로스를 그리면서 사튀로스를 손가락만한 크기로 재현하고 그 비례 기준에 맞추어 거인의 척도를 정했다는 옛 일화를 잘 알고 있다.



브뤼겔은 네덜란드식 바벨탑을 그렸다. 바벨로니아의 시날 들판에서 안트베르펜 바닷가로 자리를 옮긴 거대 건축물은 우뚝 솟은 돌산을 기초로 삼았다. 밋밋한 평지보다는 하나님의 '반석'위에 기댄 건축이 든든했을 것이다. 르네상스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돌산의 지반이 기운 탓일까, 바벨탑의 종축이 기우뚱하다.

브뤼겔은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을 관찰하고 자신의 건축적 지식을 확장한다. 르네상스식 바벨탑의 설계안은 고대 콜로세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 원형 극장의 내부 구조와 외부 장식이 바벨탑에 원모습 그대로, 또는 안팎이 뒤집힌 대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화가들은 고대의 숫돌에다 창의와 상상의 붓을 벼리기 좋아했다. 100년 뒤 독일인 예수회 수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히너가 지구에서 달까지 닿은 바벨탑을 짓는 데 들어가는 건축 자재의 분량을 계산한 것도 비근한 사례에 속한다.

브뤼겔의 바벨탑은 와해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당시 인구 10만을 헤아리던 해안 도시의 풍성한 재력이 새로운 바벨탑을 지었다. 원근의 중개 교역으로 도시의 재정을 살찌웠던 안트베르펜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유럽의 수많은 한자 도시로부터 황금의 누런 신기루를 좇아 몰려든 상인들로 안트베르펜의 도심과 항구 선술집은 밤낮없이 붐비었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의 자회사와 지사들이 브뤼겔의 시대에 이미 100곳을 넘었다.

탑신의 허리에는 푸른 지평선이 비옥하게 감돌고 어깨에는 흰 구름이 정겹게 걸쳐졌다. 인간의 무모한 도전에 분노하는 신의 노여움은 어느 귀퉁이에도 보이지 않는다. 먼 곳에서 수입한 값비싼 자재들이 범선과 뗏목에 하나 가득 적재되어 이곳으로 실려온다. 인부들이 바닷바람에 널어 둔 하얀 빨래의 풍경이 한가롭다.

브뤼겔은 바벨탑의 신화를 다르게 해석했다. 하나님이 흩뜨린 인간의 언어는 저주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창세기의 인간에게 내린 언어의 저주는 도시의 살림을 살찌우는 반가운 은총으로 바뀌었다. 화가는 오래 전 와해한 바벨탑의 잔해를 끌어 모아서 자유롭게 상상하는 자유 도시의 신화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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