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6
essay122_body.jpg

그랬던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소위 말하는 미대 다닌 남자였다(이대 아니고 미대라고 그는 또 아재개그를 날렸다). 그는 그런 그의 타이틀이 나름 있어보인다며 은근히 만족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디자인 전공에 대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고 털어 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그런 그가 참 안쓰러웠다.  

“뭘 했다구요?” 

거의 반 이상은 다시 묻고 재차 확인 한다고 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체크하며 말이다. 

“근데 너 옷 입은게 왜 그 모양이니? 하하하!” 

솔직한 친구들도 간혹 있다고 했고 시원한 웃음소리는 어색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그 모양인데?’라고 말하지는 못했는데, 그러한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소심하다고 누차 에세이에서 밝혀왔다고도 했다. 

사실 그가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학 중 프랑스 자수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패션필드에 뛰어들었고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뜨개질과 정신건강과의 상관관계’라는 논문으로 동네 문화센터에서 일약 떠오르는 별로 주목을 받았다거나 했던 일도 더더욱 없다.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하고 취업하여 정글같은 의류업체에 근무하는 내내 그와 맞지 않을 뿐더러 외향적이고 자신의 장점과 매력을 항상 드러내야 하는 일의 성향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그는 학교 재학 중 내내 숱한 번민과 갈등,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는데 대부분은 밑바닥 수준의 형편없는 드로잉 실력 때문이었고 그로인해 오는 번민과 갈등은 편의점 싸구려 1+1 캔 커피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전공과목보다는 철학이나 비주얼 어널리시스(서양미술사 정도 되는 과목이었다), 사진 같은 보통 애들이 설렁설렁 하는 과목에 학구열을 불태웠고 학교에서 유명인사나 작가들을 초청하여 마련하는 특별 강연에는 열일 제쳐두고 참석했던 것 같다. 

전공과목 수업 얘기를 들어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바로 드로잉 펀더멘탈, 기초소묘 클래스라고 말 할 수 있겠다(과목이름은 모두 영어였다). 담당교수는 첫 수업 내내 그의 뒤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그 당시 아마도 심하게 버벅거리는 그의 뒤에서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열심히 앞, 뒤를 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만 두면 매월 연금이 나오나? 아니면 퇴직금으로 뭘 해야하나?’ 뭐 대충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던 97학번의 순진한 청년은 디지털디자인 과목 수업 첫날, 앞에 놓인 컴퓨터가 색깔이 너무 예쁘다고, 역시 우리학교는 다르다고 좋아했다고 했으나, 몇 번의 수업 이후로 그는 애플도 별거 아니라는 둥, 자신은 아직 아날로그 인간이고 어도비의 포토샵을 누가 쓰겠냐고 말하며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까지 애플사의 스마트 폰을 들고 다녔는데 퍽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수업이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며 졸고 있던 나를 깨웠는데 여기서는 조금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그가 무엇인가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첫 수업 때부터 자신을 위해 개설한 강의인 것 같았다며 그 이유는 바로 드로잉 스킬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컨셉추얼한 무언가에 더욱 높은 비중을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체 드로잉 컨셉이 무어냐고 내가 묻자, 그도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는데 대충 짐작컨대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 전위 음악 같은 곡을 듣고 느낀 바와 생각하는 바를 드로잉으로 표현하거나 하는 그러한 과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컨셉만 훌륭하면 드로잉 ‘따위’는 조금 수준이 떨어지거나 대충해도 문제없을 것이란 얄팍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첫 과제를 벽에 붙이고 자신의 그림 컨셉과 의도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크리틱(왠지 어감이 무서웠다)’과정에서 그는 ‘장황스러운’ 설명과 포장으로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고 그러한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는 점점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회심의 파이널 프로젝트, 기말과제가 주어졌고 준비과정에서 지도교수와의 면담이 잡혀있었는데, 보통 파이널 프로젝트의 방향과 작업진행계획들을 상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점수 비중이 높은 과제고 여름학기의 마지막 프로젝트라 그 역시 최선의 준비를 다하고 교수와 만났다고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며 잠시 말을 멈췄는데 교수가 불쑥 던진 그 말을 정확히 그대로 기억한다고 했다. 

“있잖아, 돌 하나를 제대로 그려봐. 그러면 거기서 컨셉이 절절 흘러 나오는 거야.” 

학생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며 존대를 해왔던 그 지도교수가 동네에서 좀 놀았던 형이 동생한테 내던지며 툭 말하는 듯, 그 말투에도 번뜩 정신이 들었었다고 말하며 면담은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마무리하고 서둘러 교수의 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럭저럭 파운데이션 과정을 마쳤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그 말이 아직도 그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제가 97학번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입니다. 드로잉 컨셉이라는 과목이 어떠한 내용의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저는 또 어떠한 과제물을 제출했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그 이후에도 학년이 바뀌어 전공과목 수업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못 붙였습니다. 오로지 면담과정에서 지도교수가 제게 한 그한마디는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떠한 스킬보다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하며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까지 흘렀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던 그 순간의 감정과 교수의 말투와 어조, 단어 하나하나까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만큼 그의 한마디가 저의 안이한 태도와 생각, 나태함에 일격을 가한 까닭인 것 같습니다.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실력에 논리적으로도 빈약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가 무척 곤욕스러웠을 그때 그 지도교수와 그의 한마디가 유독 생각나는 이 밤, 올해 들어 처음 맞는 열대야로 뒤척이는 긴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에세이소개HCY.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166

#01. 금순이를 찾아서 _ 지근욱 file

두 배는 최대한 많이 실으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한 배는 자유와 생명의 땅에 도착했고, 다른 한 배는 깊은 바닷속으로 잠겼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세월호 이야기다. 먼저 1950년 12월 흥남 부두로 가 보자. 6.25...

 
2015-03-12 618
165

#02. 비상식과 상식의 경계: 그 매력적 오답의 치명적 유혹 _ 송현석 file

비상식과 상식의 경계 -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셨나요? “합리적 의사 결정, 민주적 절차,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학문적 근거 제시, ... ” 말은 한참 어려워도 결국은 우리네 삶의 기준이 되고 많은 학문적 접근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

 
2015-03-13 739
164

#03. 슬픔의 절정에 춤을 준비하는 사람들 _ 홍미례 file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생애 처음으로 맞이한 죽음은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죽음이었다. 내 친구의 막내 동생이기도 했던 아이는 유...

 
2015-03-13 647
163

#04. 두 배 _ 최주영 file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식이 지금보다 ‘두 배’로 속을 썩인다면 어떨까? 부모 중 열에 아홉은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낫...

 
2015-03-13 579
162

#05. 사순절을 지키는 두 가지 모습 _ 홍봉준 file

사순절 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A.D. 325)에서 결정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해가 진 다음에 한 끼 식사만 허용하고 육식은 물론 생선과 달걀도 40일 내내 금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킨 반면에 서...

 
2015-03-13 702
161

#06. 거짓말 그리고 봄 _ 강명선 file

겨울이 가는구나. 봄방학 말미에 그녀를 만나러 경복궁역을 향해 간다. 나와 함께 이곳 평강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그녀를 이제 교회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녀가 나를 부르면 내가 간다. 늘 내 가방에는 머뭇머...

 
2015-03-14 763
160

#07. 신앙의 성과 지표 _ 김태훈 file

CEO 모임에 가보면 그 모임의 성격에 따라 주고받는 질문도 다르다. 유명 경제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포럼이나 조찬모임의 경우 규모가 큰 기업들의 CEO들이 많이 참석하는 만큼 최근 화두에 오르고 있는 경영 키워드에 대한 논의가 많다. “대표님 ...

 
2015-03-21 723
159

#08. 인생 최후의 오디션 _ 원재웅 file

최근 화제에 오르고 있는 영화 ‘위플래쉬’는 천재 드러머를 갈망하는 학생 앤드류와, 그의 광기가 폭발할 때까지 몰아치는 폭군 플렛처 교수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올해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음향상, 편집상 등 무려 3개 부문을 석...

 
2015-03-28 829
158

#09. 게으른 파수꾼, 추억의 발걸음을 걷다 _ 송인호 file

길을 나서볼 때입니다. 어느덧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모이고, 시간이 되었습니다. 충전이 잘 된 LED 랜턴과 손에 달라붙는 알루미늄 방망이 하나를 집어 들고 말입니다. 첫 행선지는 내 맘대로 정한 순서대로 예전 회계실 건물입니다. 손전등을 비춰가며 ...

 
2015-04-04 749
157

#10. 분노 조절 장애 _ 지근욱 file

욱! 하는 성격 종종은 아니지만 아주 드물게(?) 나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와이프에게 핀잔을 듣는다. 특정할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 마주하면 버럭 화를 낸다. ‘아차!’하지만, 이미 주변 상황은 불편해져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노하기를 더디 하라...

 
2015-04-18 1106
156

#11. 동행(同行), 그 마지막 모퉁이를 돌며 _ 송현석 file

굳어져버린 발뒤꿈치의 살이 이제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상처 속 피가 굳어지니 이내 검게 썩은 듯한 갈라진 자국으로 변한다. 사뭇 놀랐으나, 검은 양말의 솜털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알아챈 후 애써 위안덩이로 삼는다. 얼마 전까지 그래...

 
2015-04-25 1248
155

#12. 타인의 고통에 한 걸음 다가서기 _ 홍미례 file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이해는 없고 따라서 완전한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고 공감의 폭을 넓히는 데에는 직접, 간접적 체험이 가장 효과적이겠지요. 이를테면 타인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의 통...

 
2015-05-02 607
154

#13. 불멸 _ 최주영 file

5월입니다. 영어 이름인 ‘May’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부의 수호신, 봄과 성장의 신, 모든 식물의 성장을 담당하는 여신 마이아(Maia)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피천득은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괴...

 
2015-05-09 549
153

#14. 뒤에서 들리는 스승의 목소리 _ 홍봉준 file

5월은 일 년 중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부모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사람의 성장과 가르침에 관련된 날들이다. 그중에서 스승의 날은 그 의미와 가치가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스승은 변치 않는 우리 ...

 
2015-05-16 658
152

#15. 신앙의 건강을 위한 균형 있는 식단 _ 김태훈 file

건강식품 유통업을 하는 지인을 만났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가짜 백수오 사건으로 업계가 비상이라고 한다. 5월은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있어 통상 일 년 중 건강식품의 판매가 가장 활발해야 하는 시점인데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2015-05-23 469
151

#16.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을까 _ 맹지애 file

시대가 변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슴 뛰는 꿈을 꾸고 어른들은 그 꿈을 응원하던, 말 그대로 ‘꿈’만 같던 시기가 흘러가버렸습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업을 얻고, 좋은 직업을 얻어야 편...

 
2015-05-30 753
150

#17. 울타리 _ 강명선 file

토요일 아침이다. 햇살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놀아야 한다. 자는 아들 깨워서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오류동 탐험을 나섰다. 작년 봄에 이사 왔지만 늘 집과 교회를 반복하다 보니 아직도 못 가봐 궁금한 곳이 많다. 자전거 길을 찾아 돌다가 빵집에 들...

 
2015-06-06 510
149

#18. 유작(遺作) _ 원재웅 file

1. 1685년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에 사는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집안에 여덟 번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버지 요한은 거리의 악사였기에 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며 자라난다. 아홉 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가난한 큰형의 집에 얹혀살며 음악 공부...

 
2015-06-13 554
148

#19. 위험불감증 _ 김범열 file

 중동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MERS,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의료진과 방역 당국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로 붐벼야 할 시내 유명 백화...

 
2015-06-20 474
147

#20. King of Mask Singers _ 송인호 file

"복면가왕"이란 프로죠. 내가 이렇게 노래를 잘 하는데, 이 정도로 음악성이 있는데, 난 아직 잊힐 때가 아닌데, 난 너무 저평가 되었는데... 이런 출연자들을 모아 모아 가면을 씌우고 노래로 순위를 정하는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가면을 쓴 가...

 
2015-06-27 574
PYUNGKANG NEWS
교회일정표
2024 . 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찬양 HYMNS OF PRAISE
영상 PYUNGKANG MOVIE
152-896 서울시 구로구 오류로 8라길 50 평강제일교회 TEL.02.2625.1441
Copyright ⓒ2001-2015 pyungkang.com. All rights reserved. Pyungkang Cheil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