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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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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는구나. 봄방학 말미에 그녀를 만나러 경복궁역을 향해 간다. 나와 함께 이곳 평강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그녀를 이제 교회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녀가 나를 부르면 내가 간다. 늘 내 가방에는 머뭇머뭇 담아온 구속사 책이나 ‘참평안지’가 담겨있다. 그녀가 반길 선물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그녀에게 전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니까. 최근 서촌으로 이사한 그녀가 서울 성곽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했다. 황사 낀 하늘 아래 우리 둘이는 청운동 언덕을 올랐다. 사설 경비가 지키는 고급 빌라의 출입문을 지나며 “저런 곳에 애를 버리잖아. 그리고 엄마가 골목에서 보고 있고”라며 아침 드라마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 언덕의 끝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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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실에 들어가니 우연찮게도 관람객에게 구청 문화해설사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도 함께 이동하며 윤동주의 자화상이랑 시를 모티브로 한 제2전시관 배경에 대해 들었다. 항상 하늘을 바라본 우물처럼, 우리도 낡은 수도가압장 물탱크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파아랗다. 그리고 제3 전시실. 어둡다. 차갑다. 윤동주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후쿠오카 형무소. 감옥 안이다. 영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시가 흐른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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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이 시가 윤동주의 기도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1941년. 캄캄한 일제 식민지 시대. 25살의 여린 청년 하나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오롯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다. 어느새 거짓말에 익숙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나. 감히 하늘 아래 한 점의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해 본 적이 있었나. 그의 맑은 기도문에 내 마음이 후벼 판 듯 헝클어진다. 왜일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버지의 기도가 떠오른다.


기다림

내 눈자위가 붉기까지 
너를 위해 울었다.
밤잠 설치며 낙엽 쌓인
그 계곡에서 너를 위해 울었다 

무더운 여름, 한낮의 나른함에도
그 동산을 찾아
내 무릎 꿇어 너를 위해 간구했다.

깊은 겨울, 수북이 쌓인 눈 위에 앉아
눈덩이 녹아내리는 줄 모르는 채
네 영혼 위해 간구했다.

더위와 추위가 교차되고
붉음이 푸르름이 되고
푸름이 붉음이 될 때에도
뒤바뀌는 계절에 마음 매달아 둔 채
난 너를 기다려 안타까이 울었다.

내 여린 살갗에 깊이
골이 새겨지기까지
한해 또 한해 
이 한해를 넘기지 말아 달라고 
애태우며
너를 위해 간구했었다.


아버지의 눈물이 내 안에 흐른다. 죄가 더러운지도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 나를 위해 울어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기도가 왜 그 순간 떠올랐을까. 병든 우리를 위한 기도였기 때문일까. 애초에 윤동주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라는 의미에서 시집 제목을 ‘병원’이라고 붙였는데, 출간 전에 ‘서시’를 새로 쓰고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올해 2월 17일은 윤동주 시인의 제70주기라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그 언덕을 내려왔다.

케이블채널에서 방송 홍보와 마케팅 일을 하고 있을 때다. 직장생활 10년차. 아이를 낳고 서른이 넘어 시작한 신앙생활의 걸음마를 떼고 있던 무렵. 회사 영업비로 외근 나가서 기자도 만나고 업체 담당자를 만나 친목을 나눈다. 차 한 잔, 밥 한 끼 나누며 업무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안다. 이 관계에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그래서 힘들었다. 특히 상대방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더 힘들었다. 최고의 홍보와 마케팅은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을 해주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업무와 생활 모든 면에서 힘든 시기였다. 나는 진실한 일을 하고 싶었다. 어느 날 여의도에서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꽉 막힌 도로에서 눈물이 터졌다. 더 이상 이 일이 하고 싶지 않다고. 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유일한 혼자만의 공간이던 내 자동차 안에서 펑펑 울며 기도했었다. 선생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남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일이니까. 나는 내친김에 원로목사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응답은 시편 107편 소원의 항구. 그렇게 나를 학교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나는 또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그 굳어가는 마음을 흔들어준 한 편의 시를 만나고 나는 몇 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름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나. 마음에 먼지가 앉아도 먼 산을 보는 나. 방바닥만 쓸고 있는 나. 어려운 일 닥치면 울고불고 회개하겠지. 이런 내 마음을 보니 하늘을 무슨 낯으로 보나 한숨이 나오는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어쩜. 딱. 이 순간에. 한심한 딸을 위로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인생의 보따리를 풀고 그 안에 회개와 각성과 통회하는 마음을 담으라고. 그리고 봄을 기다리라고. 열 살 아들에게 서시를 들려준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시라고 알려준다. 아들이 더듬더듬 시를 읊는다. 그 소리에 내 마음이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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