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6
등록일

2015.03.14

pkblog_body_m.jpg


겨울이 가는구나. 봄방학 말미에 그녀를 만나러 경복궁역을 향해 간다. 나와 함께 이곳 평강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그녀를 이제 교회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녀가 나를 부르면 내가 간다. 늘 내 가방에는 머뭇머뭇 담아온 구속사 책이나 ‘참평안지’가 담겨있다. 그녀가 반길 선물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그녀에게 전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니까. 최근 서촌으로 이사한 그녀가 서울 성곽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했다. 황사 낀 하늘 아래 우리 둘이는 청운동 언덕을 올랐다. 사설 경비가 지키는 고급 빌라의 출입문을 지나며 “저런 곳에 애를 버리잖아. 그리고 엄마가 골목에서 보고 있고”라며 아침 드라마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 언덕의 끝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다.

_jeil2.jpg


1층 전시실에 들어가니 우연찮게도 관람객에게 구청 문화해설사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도 함께 이동하며 윤동주의 자화상이랑 시를 모티브로 한 제2전시관 배경에 대해 들었다. 항상 하늘을 바라본 우물처럼, 우리도 낡은 수도가압장 물탱크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파아랗다. 그리고 제3 전시실. 어둡다. 차갑다. 윤동주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후쿠오카 형무소. 감옥 안이다. 영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시가 흐른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poem2.jpg


어둠 속에서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이 시가 윤동주의 기도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1941년. 캄캄한 일제 식민지 시대. 25살의 여린 청년 하나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오롯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한다. 어느새 거짓말에 익숙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나. 감히 하늘 아래 한 점의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해 본 적이 있었나. 그의 맑은 기도문에 내 마음이 후벼 판 듯 헝클어진다. 왜일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버지의 기도가 떠오른다.


기다림

내 눈자위가 붉기까지 
너를 위해 울었다.
밤잠 설치며 낙엽 쌓인
그 계곡에서 너를 위해 울었다 

무더운 여름, 한낮의 나른함에도
그 동산을 찾아
내 무릎 꿇어 너를 위해 간구했다.

깊은 겨울, 수북이 쌓인 눈 위에 앉아
눈덩이 녹아내리는 줄 모르는 채
네 영혼 위해 간구했다.

더위와 추위가 교차되고
붉음이 푸르름이 되고
푸름이 붉음이 될 때에도
뒤바뀌는 계절에 마음 매달아 둔 채
난 너를 기다려 안타까이 울었다.

내 여린 살갗에 깊이
골이 새겨지기까지
한해 또 한해 
이 한해를 넘기지 말아 달라고 
애태우며
너를 위해 간구했었다.


아버지의 눈물이 내 안에 흐른다. 죄가 더러운지도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 나를 위해 울어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기도가 왜 그 순간 떠올랐을까. 병든 우리를 위한 기도였기 때문일까. 애초에 윤동주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라는 의미에서 시집 제목을 ‘병원’이라고 붙였는데, 출간 전에 ‘서시’를 새로 쓰고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올해 2월 17일은 윤동주 시인의 제70주기라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그 언덕을 내려왔다.

케이블채널에서 방송 홍보와 마케팅 일을 하고 있을 때다. 직장생활 10년차. 아이를 낳고 서른이 넘어 시작한 신앙생활의 걸음마를 떼고 있던 무렵. 회사 영업비로 외근 나가서 기자도 만나고 업체 담당자를 만나 친목을 나눈다. 차 한 잔, 밥 한 끼 나누며 업무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안다. 이 관계에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그래서 힘들었다. 특히 상대방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더 힘들었다. 최고의 홍보와 마케팅은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을 해주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업무와 생활 모든 면에서 힘든 시기였다. 나는 진실한 일을 하고 싶었다. 어느 날 여의도에서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꽉 막힌 도로에서 눈물이 터졌다. 더 이상 이 일이 하고 싶지 않다고. 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유일한 혼자만의 공간이던 내 자동차 안에서 펑펑 울며 기도했었다. 선생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남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일이니까. 나는 내친김에 원로목사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응답은 시편 107편 소원의 항구. 그렇게 나를 학교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나는 또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그 굳어가는 마음을 흔들어준 한 편의 시를 만나고 나는 몇 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름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나. 마음에 먼지가 앉아도 먼 산을 보는 나. 방바닥만 쓸고 있는 나. 어려운 일 닥치면 울고불고 회개하겠지. 이런 내 마음을 보니 하늘을 무슨 낯으로 보나 한숨이 나오는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어쩜. 딱. 이 순간에. 한심한 딸을 위로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인생의 보따리를 풀고 그 안에 회개와 각성과 통회하는 마음을 담으라고. 그리고 봄을 기다리라고. 열 살 아들에게 서시를 들려준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시라고 알려준다. 아들이 더듬더듬 시를 읊는다. 그 소리에 내 마음이 맑아진다.





essay06.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26

#26. 광복 70년, 70년만의 해방 _ 홍봉준 file

유독 우리에게 친숙한 '7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광복절이다. 정부는 하루 전날을 임시 공휴일로까지 지정하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가적인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광복 후 걸어온 70년의 발자취가 세계사에서 유...

 
2015-08-15 503
25

#25. 조합의 창의성 _ 최주영 file

이 세 가지 물건들은 사람의 손안에 쏙 들어오게 디자인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호모 에렉투스가 100만 년 넘게 사용했다고 알려진 손도끼입니다. 그 이전 원시인류의 최첨단 도구는 돌망치였지만 호모 에렉투스에 이르러 발명된 ...

 
2015-08-01 521
24

#24. 황금종 아래에서 (holyday vs holiday) _ 홍미례 file

일 년 중 상반기를 결산하고 나면 하계대성회에 초점을 맞추고 일정을 잡습니다. 하계대성회는 상반기 평가를 통해 하반기에 부족한 것을 채우는 동시에 혁신을 다짐하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화려한 휴가의 정점이지만 ...

 
2015-07-25 570
23

#23. 위인전(偉人傳) _ 송현석 file

요즘은 나름 착하게 살아봐야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면서, 누렇게 색이 변하기 시작한 옛날 말씀 노트를 자주 뒤적이게 된다. 이것 또한 작은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니, 괜히 작은 뿌듯함의 스타카토 화음이 귓가에 자주 울린다. 사실 우리가 '빛바랜 ...

 
2015-07-18 548
22

#22. 평강제일교회의 소리 _ 지근욱 file

가수 박진영이 홀로(?) 열심히 설명하는 세계가 '공기 반 소리 반'이다. 소리의 세계도, 진위(眞僞)가 분명한 하나님 소리와 사람 소리가 반반씩은 존재한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기는 사람 소리가 커져서 세상을 덮을 기세지만, 하나님의 소리는 작지만 큰 능...

 
2015-07-11 564
21

#21.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며(아빠의 정년퇴직을 기념하며) _ 박다애 file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어릴 적에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고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군인 하지 말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 전쟁이 난다면 50년대 전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

 
2015-07-04 728
20

#20. King of Mask Singers _ 송인호 file

"복면가왕"이란 프로죠. 내가 이렇게 노래를 잘 하는데, 이 정도로 음악성이 있는데, 난 아직 잊힐 때가 아닌데, 난 너무 저평가 되었는데... 이런 출연자들을 모아 모아 가면을 씌우고 노래로 순위를 정하는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가면을 쓴 가...

 
2015-06-27 574
19

#19. 위험불감증 _ 김범열 file

 중동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MERS,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의료진과 방역 당국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로 붐벼야 할 시내 유명 백화...

 
2015-06-20 474
18

#18. 유작(遺作) _ 원재웅 file

1. 1685년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에 사는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집안에 여덟 번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버지 요한은 거리의 악사였기에 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며 자라난다. 아홉 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가난한 큰형의 집에 얹혀살며 음악 공부...

 
2015-06-13 554
17

#17. 울타리 _ 강명선 file

토요일 아침이다. 햇살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놀아야 한다. 자는 아들 깨워서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오류동 탐험을 나섰다. 작년 봄에 이사 왔지만 늘 집과 교회를 반복하다 보니 아직도 못 가봐 궁금한 곳이 많다. 자전거 길을 찾아 돌다가 빵집에 들...

 
2015-06-06 510
16

#16.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을까 _ 맹지애 file

시대가 변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슴 뛰는 꿈을 꾸고 어른들은 그 꿈을 응원하던, 말 그대로 ‘꿈’만 같던 시기가 흘러가버렸습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업을 얻고, 좋은 직업을 얻어야 편...

 
2015-05-30 753
15

#15. 신앙의 건강을 위한 균형 있는 식단 _ 김태훈 file

건강식품 유통업을 하는 지인을 만났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가짜 백수오 사건으로 업계가 비상이라고 한다. 5월은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있어 통상 일 년 중 건강식품의 판매가 가장 활발해야 하는 시점인데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2015-05-23 469
14

#14. 뒤에서 들리는 스승의 목소리 _ 홍봉준 file

5월은 일 년 중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부모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사람의 성장과 가르침에 관련된 날들이다. 그중에서 스승의 날은 그 의미와 가치가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스승은 변치 않는 우리 ...

 
2015-05-16 658
13

#13. 불멸 _ 최주영 file

5월입니다. 영어 이름인 ‘May’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부의 수호신, 봄과 성장의 신, 모든 식물의 성장을 담당하는 여신 마이아(Maia)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피천득은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괴...

 
2015-05-09 549
12

#12. 타인의 고통에 한 걸음 다가서기 _ 홍미례 file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이해는 없고 따라서 완전한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고 공감의 폭을 넓히는 데에는 직접, 간접적 체험이 가장 효과적이겠지요. 이를테면 타인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의 통...

 
2015-05-02 607
11

#11. 동행(同行), 그 마지막 모퉁이를 돌며 _ 송현석 file

굳어져버린 발뒤꿈치의 살이 이제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상처 속 피가 굳어지니 이내 검게 썩은 듯한 갈라진 자국으로 변한다. 사뭇 놀랐으나, 검은 양말의 솜털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알아챈 후 애써 위안덩이로 삼는다. 얼마 전까지 그래...

 
2015-04-25 1248
10

#10. 분노 조절 장애 _ 지근욱 file

욱! 하는 성격 종종은 아니지만 아주 드물게(?) 나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와이프에게 핀잔을 듣는다. 특정할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 마주하면 버럭 화를 낸다. ‘아차!’하지만, 이미 주변 상황은 불편해져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노하기를 더디 하라...

 
2015-04-18 1106
9

#09. 게으른 파수꾼, 추억의 발걸음을 걷다 _ 송인호 file

길을 나서볼 때입니다. 어느덧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모이고, 시간이 되었습니다. 충전이 잘 된 LED 랜턴과 손에 달라붙는 알루미늄 방망이 하나를 집어 들고 말입니다. 첫 행선지는 내 맘대로 정한 순서대로 예전 회계실 건물입니다. 손전등을 비춰가며 ...

 
2015-04-04 749
8

#08. 인생 최후의 오디션 _ 원재웅 file

최근 화제에 오르고 있는 영화 ‘위플래쉬’는 천재 드러머를 갈망하는 학생 앤드류와, 그의 광기가 폭발할 때까지 몰아치는 폭군 플렛처 교수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올해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음향상, 편집상 등 무려 3개 부문을 석...

 
2015-03-28 829
7

#07. 신앙의 성과 지표 _ 김태훈 file

CEO 모임에 가보면 그 모임의 성격에 따라 주고받는 질문도 다르다. 유명 경제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포럼이나 조찬모임의 경우 규모가 큰 기업들의 CEO들이 많이 참석하는 만큼 최근 화두에 오르고 있는 경영 키워드에 대한 논의가 많다. “대표님 ...

 
2015-03-21 723
PYUNGKANG NEWS
교회일정표
2024 . 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찬양 HYMNS OF PRAISE
영상 PYUNGKANG MOVIE
152-896 서울시 구로구 오류로 8라길 50 평강제일교회 TEL.02.2625.1441
Copyright ⓒ2001-2015 pyungkang.com. All rights reserved. Pyungkang Cheil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