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시는 예수님
2025.06.07
눅 23:32-34
(제25-23호)
이해하시는 예수님
눅 23:32-34
구약 성경의 인물 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이해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 가운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넓은 마음과 풍성한 은혜를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1.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이해했습니다.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얼마나 급했던지 맨발로 도망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울의 집 족속 가운데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했습니다(삼하 16:5-6). 시므이가 저주할 때, 다윗왕의 신하인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삼하 16:9).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이해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인 압살롬도 아비를 죽이려고 하는데 ‘베냐민 지파인 시므이가 나에게 저주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을 저주하게 하심이라고 여겼습니다(삼하 16:10).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이해는,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될 때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고(삼하 19:22-23) 오히려 그를 다윗이 신하로 삼은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이해하면 용서가 되고 복수하지 않습니다. 다윗왕이 시므이에 대해서 진심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왕이 시므이를 죽이지 말 것을 솔로몬에게 유언한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왕상 2:8). 반면에, 솔로몬은 시므이를 이해하지 못하여서 죽였습니다(왕상 2:46). 이해하지 못하면 남을 욕하며, 내가 싫은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진심으로 이해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2. 다윗은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이해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였습니다(삼하 16:22). 그러나 다윗은 반역자 압살롬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이해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다윗은 신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고 말했습니다(삼하 18:5). 그러나 압살롬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압 장군은 압살롬을 죽였습니다(삼하 18:14-15). 다윗이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이해한 이유는 압살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압살롬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슬퍼했습니다. 왕하 18:33을 볼 때,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너무나 사랑했던 다윗왕은 “압살롬 대신 내가 죽었더면”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무리 말을 안 듣는 자녀라도, 부모가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압살롬을 대신하여 죽을 마음을 표현할 정도로 압살롬을 이해했습니다. 압살롬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였던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3. 다윗의 이해하는 마음은 죄지은 인류를 이해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계셨지만, 좌우편 강도에 대해서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좌우편 강도를 위해 기도하셨던 때는 편안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백 대의 매를 맞았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 뱉음을 당하였으며, 양손 양발에 대못이 박힌 상태에 있었습니다(마 27:28-31). 그리고 예수님께서 더운 날씨 가운데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죄지은 인류를 이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 하나님과 영교가 끊이지 않는 기도 생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심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아버지, 고통을 못 참겠습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치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히 5:7-8).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용서의 기도는 오늘날까지 죄지은 전 인류를 이해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의, 인류를 살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몇만 년이 지나도 죄지은 자를 품는 효력이 있으며, 지구가 완전히 박살이 나는 힘보다 더 큰 효력이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이해는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로마 군병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던 롱기누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요 19:34). 그런데 롱기누스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순간, 예수님의 피가 롱기누스의 보이지 않았던 눈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에 롱기누스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창으로 찌른 롱기누스를 이해하셨기 때문에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가운데 단 1%도 미움이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로마 군병도 이해하시고 생명 창조의 능력이 있는 피로 고쳐 주셨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롱기누스가 보이지 않았던 한쪽 눈이 보이게 된 후에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서 살다가 감옥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해하시어 아플 때 고침을 받게 해 주셨고,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해 주셨으니, 남은 생애는 보답하는 마음으로 뜻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