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 4
종 교 개 혁 5 0 0 주 년 기 념 특 집
종 교 개 혁 의 발 자 취 를 따 라 4
기도의 용사,
존 낙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촉발된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는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본 교회의 설립자이신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된 지 10주년이 되었고, 목회 사역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에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답사’팀을 구성하여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13일간의 일정으로 독일과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 종교개혁지를 직접 답사하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가 된 개혁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특별히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개혁신앙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글과 영상으로 성도들과 나누고자 특집을 만들게 되었다. 본지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글_홍봉준 목사
2017년 8월 30일, 아침 식사 후 곧바로 로마 샴피노(Ciampino) 공항으로 이동, 에든버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같은 유럽이지만 섬나라 스코틀랜드까지 약 세 시간가량의 여정을 마치고 당도한 에든버러는 전혀 다른 유럽의 속살이었다. 대륙의 하얀색 대리석 건물들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에 붉은 색 벽돌건물과 회색빛 칙칙한 사암으로 된 건물들이 역사의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로얄마일 거리에 있는 세인트 쟈일스 교회와 낙스의 동상이 있는 뉴 칼리지, 그리고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열린 막달린 채플 등을 돌아보고 오랜만에 한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에든버러의 낙스 관련 유적지는 크게 ‘로얄마일’로 불리우는 에든버러 성과 세인트 자일스 성당, 낙스 생가 등이고, 에든버러 시내에서는 두 시간 이상 차로 달려서 갈 수 있는 세인트 앤드루 성 등이다. 둘째 날에는 호텔에서 출발하여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원래 여행 일정에는 없던 곳이었지만 현지 가이드와 상의하는 가운데 낙스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기에 다른 일정을 조정하여 둘째 날 첫 일정으로 출발하였다.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성지,
세인트앤드루스 성
해안가에 세워진 세인트앤드루스 성은 너무나 아름답고 또 화창한 날씨 속에 낙스의 초창기 사역의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맑은 날씨와 아름다운 성의 모습과 다르게 그곳에선 스코틀랜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1528년 화형당한 곳이다. 당시 존 낙스는 약 14살 정도 되었다. 1514년, 해딩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녹스는 해밀턴이 순교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에 진학했고 1536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교회의 법률가, 즉 공증인으로 일했으며 1540년에서 1543년 사이에는 이스트로디언에서 공증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당시 인구 80만명에 사제 숫자가 3천명에 이르었고 이들의 부정부패와 탐욕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해 있었다. 잉글랜드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1534년에 ‘수장령’을 발표하여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하였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가톨릭의 신학과 의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 귀족들 중심으로 종교개혁 사상이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1542년 메리 여왕이 즉위할 당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파와 잉글랜드파로 나뉘었었다. 섭정인 아란(Arran) 백작을 중심으로는 신교도 관용정책을 주장하였고, 프랑스파는 비턴 추기경을 중심으로 확고한 가톨릭 정책들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낙스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였다. 1545년에는 조지 위셔트의 제자이자 경호인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임무는 양손검을 들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자객의 공격으로부터 위셔트를 경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셔트가 1546년 3월 1일, 세인트앤드루스 성 밖에서 체포되어 화형당하자 낙스도 개신교 신자들과 함께 세인트앤드루스 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때가 1547년이었다. 그해 부활절에 세 명의 학생과 성 안으로 피신하여 처음 요한복음을 가르치다가 그해 8월에 프랑스 군대의 침공 때 체포되어 19개월이나 갤리선의 노예로 부역하게 되었다.
이처럼 낙스가 본격적인 개혁가로 활동하기 전에 세인트앤드루스 성은 이미 개혁자들의 성지가 되었고, 조지 위샤트의 경호인으로 활동하던 낙스는 그곳의 피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다가 점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영향력 있는 설교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낙스와 개신교 종교개혁의 만남
잉글랜드의 중재로 프랑스 갤리선에서 풀려난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릭(Berwick)에서 성직자로 임명되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1549년부터 1551년까지 버릭과 뉴캐슬에서 활동하다 에드워드 6세 때 런던으로 가서 궁정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러다 1553년 ‘피의 메리’(Blood Mary)가 왕위에 오르자 박해를 피해 유럽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가 1554년 3월 초경이었다. 유럽으로 간 낙스는 칼빈 밑에서 성경은 연구하고 그곳에서 잉글랜드의 피난민을 위한 협동목사로 일하다 다시 제네바에서 1556년부터 1559년까지 영국인 교회의 목회자로 일했다. 그러던 중 1559년 4월에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위에 오르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기간이 개인적으로 낙스에게는 고통스런시간이었지만,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사에서는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미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을 수용하여 무릎을 꿇고 성찬에 참여하는 가톨릭 관습을 철폐하고 성찬의 제병을 빵으로 대체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실행하였던 낙스였지만, 유럽에서 낙스와 쯔빙글리의 제자 불링거 등과 만나 교류하면서 좀 더 체계적인 개혁신학을 습득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칼빈과 파렐과 더불어 존 녹스의 이름도 같이 새겨져 있다. 토마스 칼라일은 자신의 책에서 녹스에 대해 언급하기를 “녹스는 스코틀랜드와 뉴잉글랜드와 올리버 크롬웰의 믿음, 곧 청교도주의의 설립자이자 제사장이었다”라고 하였다.
한편 낙스가 유럽에서 개혁자들과 교류하며 목회하는 사이 고국 스코틀랜드에서는 기즈 메리가 섭정으로 통치하며 친가톨릭 정책에 따라 프로테스탄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1557년 개신교 지도자들이 ‘회중의 지도자들’이라는 조직을 결성, 박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교회를 조직하였고 편지를 보내 낙스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후 1572년 11월 24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낙스의 스코틀랜드 사역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는 세인트 쟈일스 성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자로 마지막까지 헌신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1년 전에는 유럽에서 메리 여왕의 박해를 보고 ‘여성들의 극악한 통치를 반대하는 첫 번째 나팔소리’를 집필하여 후에 엘리자베스 여왕과도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낙스는 결코 세상의 권력자들과 타협하지 않았고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의 개혁자들보다 더욱 철저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동기도서’와 ‘제1치리서’의 작성을 주도하였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집필을 거의 완성하여, 그가 죽은 후 6년 뒤인 1578년 잉글랜드 청교도에 의해 출판되어 후대에까지 개신교 신앙을 전수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낙스에 대한 역사가의 평가는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잉글랜드의 군대보다 낙스의 기도를 더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낙스는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에 대해 에드워드 6세의 신하이자 대사였던 랜돌프는 “한 시간에 걸친 한 사람의 목소리가 500개의 나팔이 끊임없이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낙스에 이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보완하고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앤드류 멜빌에 의하면 “낙스는 처음에는 부축을 받아 강단에 올라가 간신히 기대어 서야했지만, 일단 설교를 시작한 뒤에는 다 마칠 때까지 마치 강단을 두들겨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뛰어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활기와 박력이 넘쳤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낙스는 기도와 힘있는 말씀의 선포로 거대한 국가의 권력과 가톨릭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압력에 맞서 스코트랜드를 지키는 영적 성채였고 마지막 보루였다. 또한 낙스의 성경중심주의는 청교도주의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였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이 청교도주의의 가장 큰 원리가 된 것도 낙스의 영향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잉글랜드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영어를 배우고 유럽에서 칼빈과 불링거 등과 교류하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낙스는 앙숙관계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칼빈과 함께 제네바 성경 번역에 참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가장 많이 사용된 제네바 성경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전수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7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기도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오.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오. 주님, 주님의 교회에 충실한 목회자들을 보내 주셔서 교리의 순결이 유지되게 하옵소서”
스코틀랜드에서 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먼저 눈을 감게 되는 아쉬움과 염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교회를 지키고 헌신했던 열정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위대한 영적 거장의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세인트쟈일스 교회 뒤편 주차장 부지에 있는 23이라는 숫자만 낙스의 무덤 위치를 알려주고 있고, 그곳에서 100여 미터 밑으로 내려오면 낙스의 집이 있다. 그곳에는 여전히 낙스의 숨결과 고국을 염려하며 자신을 던져 신앙을 지켰던 거인의 모습이 곳곳에 깃들어있다. 특히 많은 전시품 중 그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제네바 성경이 눈에 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숨은 조력자, 영어 성경
대륙의 종교개혁이 루터와 칼빈 등 개혁의 선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영국에는 틴데일의 영어성경이 있었다.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길 원했던 틴데일은 1524년 경 영국의 박해를 피해 루터가 살던 보름스로 가서 영어번역성경을 출간하여, 몰래 영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헨리 8세는 1538년에 “각 교구의 교회에 큰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과 유사한 수많은 성경이 교회에 비치될 수 있었다. 또한 틴데일의 번역성경은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번역에 80% 이상 반영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모국어로 된 성경은 그 어떤 개혁가의 신학이나 설교보다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종교개혁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한편 낙스는 제네바로 망명하여 난민목회를 할 때 칼빈과 함께 성경번역과 주석의 집필과정에 참여하여 1560년 ‘제네바 성경’을 펴내게 되고, 이를 스코틀랜드에 가져옴으로써 종교개혁의 아궁이에 든든한 장작을 제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