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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

평강제일교회 역사를 찾아서 1편. 동마산 교회

2018.03.25 01:01

특 별 기 획

평강제일교회 역사를 찾아서

1편. 동마산 교회

공동기획 : 참평안·휘선기념사업회

<연재 순서>

  1. 동마산 교회
  2. 서울 대방동 시온산 한돌교회
  3. 서울 신림동 일석교회
  4. 서울 노량진동 대성교회
  5. 서울 원지동 성화산 수양관

 

구속사(救贖史)가 최종 성취로 치닫는 여울목에 평강제일교회의 역사가 있다. <참평안>은 평강제일교회가 세워져 지금의 오류동 성전에 오기까지 역사의 현장을 5회에 걸쳐 탐방한다. 놀라운 것은 이 현장 다섯 곳이 모두 지금껏 성전으로 유지되고 있거나, 건물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유례 없는 초고속 성장 속에 우리가 자란 동네의 건물과 집터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어디 있던가. 길게는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현장들이 모두 보존돼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롭고 오묘한 섭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기념물을 남기셔서 후세가 기억하게 하셨다. 언약궤에 넣으신 세 개의 기념물이 그랬고,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한 돌들이 그랬다. 광야를 걷는 평강의 성도들이 평강제일교회의 역사와, 설립자 휘선 박윤식 목사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가나안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길 기대한다.

 

 

동마산교회   현재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1동 46-14

휘선 박윤식 목사는 1928년 5월 17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나서 1946년 황해도의 최고 명문인 해주동공립중을 졸업한 뒤 북한 지역을 장악한 공산당으로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출신 계급이 좋지 못하면 당원이 될 수도, 김일성대나 모스크바대에 진학할 수도 없다는 것과,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부모를 죽여도 죄가 안 된다’는 공산주의의 반인륜적 지침이 자행되는 참상을 목격한 뒤 1947년 5월 17일 월남했다. 전남 나주 영산포에 정착했다가 서울로 올라와 갖은 고초를 겪은 뒤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1948년 여수 순천 사건 진압, 1949년 개성 송악산 전투 등에 참가했고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51년 3사단(백골부대) 18연대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 적의 포탄 공격을 받고 왼쪽 대퇴부에 중상을 입었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고통과 갈증에 그는 총으로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가르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아군은 퇴각하고 부상병들만 남겨져 3일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그는 “살려주시면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아군이 3일 만에 다시 진격해 왔고 그는 미군 제1기갑사단에 구출돼 목숨을 구했다. 전역 후 ‘영혼을 살리는 일에 삶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배치된 곳이 바로 마산이었다. 당시 마산의 양대 교회로 꼽히던 중앙감리교회 서리 전도사로 있다가 동마산교회로 파송돼 이 교회를 맡았다. 그는 이곳에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목회했다.

 

 

첫 부임지에서부터 시작한 성전 건축의 역사

휘선 박윤식 목사의 생애는 성전 건축의 삶이다. 그는 첫 부임지인 동마산 교회에서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전쟁이 멈춘 지 겨우 5년, 끼니도 제대로 잇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전부터 지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작업은 악조건 속에 진행됐다. 추워지는 날씨지만 장갑 한 짝 구할 형편이 안 됐다. 모래와 시멘트를 사다가 한푼 두푼 모아 구입한 벽돌 기계로 직접 벽돌을 찍었다. 젊은 박윤식 전도사는 한편으로는 목사 고시를 준비하며 새벽 4시면 일어나 교회 종을 치고 낮에는 성전을 지었다. 1958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석달의 공사 끝에 마침내 70-80평의 교회 본당이 완공됐다. 그 뒤로도 본당 뒤에 작은 사택을 짓고 성전 옆에는 우물을 파는 등 공사는 계속됐다. 100평에 가까운 성전이니 당시 시골 교회로서는 작지 않은 크기였다. 15명 가량이던 성도가 이 성전에서 60여 명으로 늘었다. 성전 내부는 보잘 것 없었다. 처음 1년간은 목재소에서 쓰고 남은 자투리로 만든 나무 의자를 사용했지만 자꾸 부러지는 통에 가마니를 펴고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성전 옆 2백 평 땅은 개간해 시금치, 파, 김장 배추를 심고 거름을 뿌려 농사를 지었다.

이 시절 박윤식 전도사는 아침마다 큰 꿈을 품고 기도하며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라는 구절을 벽에 써놓았다. “하나님 편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수만 명을 보내 주십시오. 교회 부지 6천 평을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당시 장로, 집사들은 “목사님 믿음은 좋지만 6천 평은 너무 허황합니다. 3천 평으로 기도합시다.” 하고 권했다. 그러나 박윤식 목사는 40년간 같은 기도를 드렸고, 그 꿈이 10배 부흥된 6만 평 부지를 허락받아 지금의 오류동 성전을 건축했다.

 

매일 계속된 새벽기도

휘선 박윤식 목사는 평생 하루 두 시간 기도와 세 시간 성경읽기를 계속했다. 동마산교회 새벽기도가 끝나면 매일 혼자 무학산 십자바위에 올라 기도했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전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할 때 늘 기도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박윤식 전도사는 2년 이상 하루 두세 시간씩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다. “기도하면 곧바로 벼락 치듯 믿음을 주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면 오전 9시반, 10시쯤이었다. 그때 집에 가서 밥 한 술 얻어먹는 것이 일과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근처에는 김의방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기도원이 있었다. 성결교회 목사였던 그는 기발한 설교와 기행에 가까운 독특한 행동으로 유명했던 목회자였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며 상복 입고 지팡이를 짚은채 4년 동안 다니기도 했고, 1955년 1월에는 국회의사당 방청석에서 당시 사사오입 개헌을 빗대 “국회에서는 사사오입이 통해도 민중에게는 필요 없다. 굶주리는 국민을 위해 국회는 바른 일을 하라.”고 외쳐 구속되기도 했다. 기도하러 들어오는 박 전도사를 본 김의방 목사는 대뜸 “귀한 분이 오셨구만” 하고 말했다. 박 전도사가 “제가 뭐가 귀합니까?” 하자 “내가 보면 알지” 했다. 박 전도사는 종종 그를 위해 물 지게로 물을 길어다 주기도 하고, 그의 흙 묻은 신발을 우물가에 가져가 쌀겨와 양잿물로 만든 시커먼 빨래비누와 볏짚으로 하얗게 닦아서 가져다 놓기도 했다. 김 목사가 외출하면 그 신발을 신고 “저도 김의방 목사님 같이 눈물의 선지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종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김의방 목사는 “그랬었구만”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 계속됐다. 이후 김의방 목사는 박윤식 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한 뒤 “대한민국 사람이 다 굶어도 박 목사는 밥 먹을 자격이 있다. 내가 박 목사보다 십여 년 나이가 많지만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 이제 나는 죽어도 원이 없다”며 그의 목회를 도왔다. 서울에서 5년 동안 그를 보좌하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역할이었지만 김 목사는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이후 박윤식 목사가 개척한 서울 신림동 일석교회 당회장을 지냈다. 젊은 박윤식 전도사의 ‘신발 닦기’는 김의방 목사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동마산교회를 맡기 전 마산중앙교회를 섬길 때 큰 집회가 열리면 그는 부흥강사의 고무신을 꼭 닦아놓았다. 그 후 자신이 그 신발을 신고 강사의 영력을 배나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한 말씀이라도 놓칠세라 문 앞에서 말씀을 경청했다. 틈틈이 노방 전도에도 나섰다.

“어떤 때는 새벽부터 없어지세요. 그런 날은 노방전도하는 날이에요. 교회에 장로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하고 나가셔서 북 치고 노방 전도했다고 그래요. 북을 떵떵 치면서요. 그 시절에는 그래가며 전도들을 했어요.” (박윤식 목사 사모 민갑식 여사)

다들 형편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박 전도사와 성도들은 오순도순 재미있게 지냈다. 박윤식 목사가 종종 회고하곤 하던 산모 집에 심방 갔다가 때마침 나오는 아기를 산파가 없어서 직접 받았던 일, 몇 대째 불교 신자였다가 하나님을 영접한 ‘원 집사’라는 분이 축도 끝나자 “아멘, 나무아미타불” 했던 일화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일이었다.

 

 

개밥을 먹으며

온 나라가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이었다. 마산중앙교회 목회자 월급이 만 5천원- 만 7천원, 서울의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3만원을 받던 때였다. 시골 교회 목회자의 월급은 3천원에서 5천원 정도였다. 박윤식 전도사의 사역비는 3천원에 성미(聖米,쌀) 대두(열 되) 한 말로 정해져 있었지만 십일조와 헌금을 떼면 생활비는 2천 2백원, 쌀은 실제로는 소두(다섯 되) 한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제대로 받은 적이 없어요. 그냥 굶을 때가 많았어요. 그렇지만 박 목사님은 가난 같은 데 치우치지 않아요. 그런 건 생각 안 하죠. 그저 교회에 있으면서도 어딜 하루 종일 가 있다 오면 어디 갔다 왔냐 하면 산에 가서 기도하고 왔다고 그러고. 주기철 목사님이 기도한 데서 기도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박윤식 목사 사모 민갑식 여사)

아끼고 아껴도 20일이면 먹을 것이 없었다. 오전 11시부터 낮 1시까지는 빈민을 위한 강냉이 죽 배급이 있었다. 박 전도사는 때로 벙거지를 쓰고 깡통을 든 채 배급 행렬에 섰다. 옥수수 가루나 구제 밀가루를 풀고 소금 넣어 저어 만든 죽이었지만 한 주전자면 박 전도사 부부와 어린 장남 세 식구가 땀이 날 정도로 훈훈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배급 현장에서 교회 장로를 만났다. “웬일이시냐”는 물음에 굶고 왔다는 말을 차마 못 하고 “아이가 먹고 싶어해서 왔다.”고 답했다. 시장에 가서 시래기를 주워다가 사택 뒤에 널어놓고 겨울에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맛이 일품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틀 반을 굶은 채 심방을 간 날도 있었다. 두 집 심방을 하고 나니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세 번째 집은 동네에서 잘 사는 기와 집이었다. 함께 간 성도들을 먼저 집으로 들여 보내고 수돗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려는데 하얀 것이 보였다. 나무로 만든 개밥통에 담긴 쌀밥이었다. 사람들 눈길을 피해 수돗물에 씻어 얼른 먹었다. “먹고 나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눈이 환하게 밝아오더라.”고 그는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성도들은 “전도사님이 아까보다 찬송하시는 소리가 더 세지셨다.”며 좋아했다.

부인의 고초도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새벽 2시면 일어나서 우물에 물을 길러갔다. 6백여 명이 사는 동네에 우물은 단 하나, 늦게 가면 물을 길을 수 없었다. 길어온 물을 물동이에 일곱 번 담아서 붓고 남으면 김칫독에도 부었다. 아침에는 그 물을 데워 식구들이 세수를 했다. 1959년 어느 주일 아침에는 어린 큰아들이 아픈데 병원 갈 돈이 없었다. 부인이 ‘교회 재정부에 얘기해서 회계 장로에게 병원비 좀 가불해 오라’고 하자 박 전도사가 ‘교회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해 다투기도 했다. “서럽다 서럽다 해도 집 없는 설움과 배고픈 설움은 말로 할 수 없다”고 박윤식 목사는 말하곤 했다.

젊은 박 전도사에게도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6구 짜리 진공관 라디오를 구해서 뉴스를 듣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라디오를 산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시장 보고 오면서 동네 스피커에서 나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마산에는 유명한 곰탕집이 있었다. 큰 솥을 7개 놓고 쌓아놓은 장작을 때서 푸짐하게 고기를 끓여내는 집이었다. “평생 먹고 싶었는데 본교회 목사님이 전도사도 같이 가자는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시더라”고 그는 웃으며 회고했다. 그는 이때부터 전기 한 등, 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는 삶을 평생 실천했고 성도들에게도 누누이 강조했다. 쌀 한 톨이라도 버리면 그 쌀을 지으신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라고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가난이 얼마나 서러운 줄 알기에 가난한 이들을 보면 마음 아파하고 도와주는 일생을 살았다.

 

단지 ‘젊은 서리 전도사’가 아니었다

박윤식 전도사는 이 시절 경남 지역의 여러 목회자들과 교류했다. 후일 대한민국 최고의 부흥강사이자 한국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신현균 목사(1927-2006) 는 당시 해군 진해통제부 군목(중위)이었다. 연배가 비슷한 두 목회자는 신앙적으로 교류했다. 신 중위가 종종 찾아와 박 전도사의 집에서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두 사람은 단지 친구 사이가 아닌 1년 이상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였다. 김만규 목사(기독신보 발행인)는 “이미 동마산감리교회 교역자 시절부터 박윤식 목사는 성경의 달인이었고 성경학자였다”고 말했다. 훗날 신현균 목사가 부흥강사로 유명해진 뒤 박윤식 목사에게 “왜 나를 초청하지 않느냐”고 묻자 박 목사는 “우리 교회가 가난해서 초청할 비용이 없다”고 답했다. 신현균 목사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1974년 9월 16일부터 22일까지 1주일간 일석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같은 감리교단에 소속돼 있던 진해의 김관도 목사도 박윤식 전도사와 교류했던 목회자였다. 해군 장성들이 많이 출석하던 김관도 전도사의 교회 형편은 박 전도사보다 나았다. 박 전도사가 생계를 잇기 어려울 때 그는 3백원, 5백원 씩 그를 도와주곤 했다. 큰 돈이었다. 그러면 박 전도사는 그중 2백원을 떼어 자신보다 더 어려운 교회에 건넸다. 김 목사가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렸지만 박 전도사는 “남에게 주면 하나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안겨주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답하곤 했다.

김관도 목사의 증언도 당시 박윤식 전도사가 단지 작은 교회의 서리 전도사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박 목사님은 대단했다. 그분이 진해에 오시면 목사님 백 여 명이 모여 그분에게 성경을 공부하는 건 보통이었다. 박 목사님한테 성경을 배운 장로님들이 사례로 후하게 봉투를 드리면 목사님은 한 푼도 챙겨가지 않고 그곳 목사님들 챙겨드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곤 했다. 목사님들이 전도사지만 전도사라고 부르지 못하고 목사라고들 불렀다. 박 목사님은 나를 산으로 데리고 다니며 산상기도를 시작하게 해줬다. 박 목사님을 통해 말씀을 많이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 목사님이 부르면 어디든 따라갔다. 그는 나의 영적 스승이다.”라고 김관도 목사는 말했다. 박윤식 전도사가 있는 마산까지 찾아오는 목회자들도 많았다. 몇 명씩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좁은 집이지만 함께 묵으면서 성경을 배우고 토론하기도 했다.”고 민갑식 여사는 증언했다.

 

핍박과 환난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처럼 박윤식 전도사에게도 핍박과 환난이 많았다. 전쟁 직후인 당시는 북한 출신에 대한 편견과 배척이 심할 때였다. “이북 사투리를 못 알아듣겠다.”, “이북 목사 모시기 싫다”며 장로들이 그를 배척했다. 석 달 동안 월급을 끊기도 했다. 네 살 된 큰 아들이 배고파 손가락을 빠는 모습을 보고 “교회 앞 배추밭에서 배추 뽑아다 먹을까?” 하고 물었더니 주일학교 다니던 아들이 “남의 것 훔쳐 먹으면 지옥 가” 하는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회개하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던 조중걸이라는 젊은 신도가 던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피가 오늘날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왔을 것 아니냐. 그런데 좌우편 강도의 피나 예수의 피나 똑같지 뭐가 다르냐.”라는 도전적 물음은 그로 하여금 장안산에서의 47일간 산상기도, 지리산에서의 3년 6개월 7일간의 목숨을 건 산상기도를 결행하게 한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그 기간을 통해 수십 년 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한 구속사 시리즈의 근간이 형성된다.  2부로 이어집니다

 

글_호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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