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기혼샘 ① 다윗의 시온성 정복 대역사
예루살렘 기혼샘 ①
다윗의 시온성 정복 대역사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가장 다양한 이름을 가진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창세기 14장에서 ‘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기 전부터 여부스 족속이 점거한 뒤 시온산에 성을 쌓아 ‘여부스’라고 불렸다.
당시 ‘시온’이라는 지명은 예루살렘 남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언덕으로, 기드론 골짜기와 티로포에온 골짜기가 합류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분배할 때 시온을 기준으로 예루살렘 지역 남부는 유다 지파의 분깃으로, 북부는 베냐민의 분깃으로 주어졌다. 유다 지파는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삿 1:8), 시온산에 위치한 여부스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수 15:63). 베냐민 지파 역시 여부스 점령에 실패했다(삿 1:21). 결국 예루살렘을 정복해놓고도 핵심 요지인 여부스를 점령하지 못함으로 두 지파는 예루살렘에 도시를 세울 수가 없었다. 소위 ‘알박기’를 당한 셈이다. 그렇게 사사 시대 340년이 지나고 사울 왕의 40년 통치가 지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부스를 점령하지 못했다.
시온은 지형상 점령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근동 지방의 도시들은 3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했다. 골짜기는 천연 성벽을 제공하기 때문에 골짜기 위에 성벽을 세우면 당시의 기술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높은 분지는 멀리까지 확 트인 시야를 바탕으로 적의 군세와 공격로를 미리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온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유독 시온에 위치한 여부스만큼은 점령되지 않았을까?
성을 공격하기 위한 최초의 공성(攻城) 병기는 주전 1,200년경 앗수르에 의해 발명되었다. 당시 공성 병기는 큰 탑을 만들고 바퀴를 달아 성벽에 접근하고, 탑에 달린 대형 망치로 성벽을 직접 타격하는 형태였다. 이 병기는 평지에 위치한 성읍을 공략하기에는 좋았지만, 골짜기를 올라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고대 근동지방의 공성전은 도시를 포위한 뒤, 공수 양측 중 한쪽이 먼저 식량과 물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읍은 정중앙에 거대한 곡식 저장고와 지하의 물 저장소를 건설해서 전쟁에 대비했다. 설령 곡식은 떨어져도 다른 식량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물이 바닥나는 것은 곧 성읍이 점령되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여기에 난공불락의 성 여부스의 비밀이 있었다. 여부스 성읍 동쪽 기드론 골짜기 아래에 있는 기혼샘은 이 지역의 유일한 샘이다. 기혼샘은 간헐천으로 하루에 2~4번 약 1톤 정도의 물이 솟아나왔다. 대략 2,500명 정도가 마실 수 있는 양이다. 여부스를 공격하는 측에게는 성 밖 골짜기 아래 위치한 기혼샘은 봉쇄해야 할 첫 번째 장소였다.
그런데 기혼샘까지 가는 통로가 봉쇄당해도 여부스 성으로의 물 공급은 끊어지지 않았다. 여부스에는 기혼까지 이어지는 지하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부스 사람들은 기혼샘에서 이어지는 약 13m 정도 길이의 수평터널을 파서 기혼샘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끌어온 후 약 12미터 깊이의 수직터널을 뚫어 지하의 물 긷는 통로와 연결하였다. 덕분에 성 밖에 겹겹이 포위를 당하고 기혼샘으로의 통행이 봉쇄돼도 물이 마를 일이 없었다. 이 비밀은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부스를 정복 불가능한 도시로 만들어주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시온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은 다윗이었다. 다윗은 헤브론 7년 6개월 통치를 마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면서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삼기 원했다. 전쟁에 능한 다윗에게 오랜 기간 눈에 가시 같던 여부스를 점령하는 것은 의무와도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모두의 기업(基業)으로 주어진 도시였으며, 남쪽에 치우친 헤브론보다 12지파 전체의 중앙 지점으로서 전체 이스라엘의 화합을 위해서도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난공불락의 시온성을 탈환하기까지는 다윗의 용사들의 ‘일사각오 순교정신’이 있었다.
이에 다윗은 여부스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다윗의 여부스 점령에 대해 사무엘하 5:6-10과 역대상 11:4-9에 기록돼 있는데, 400년 이상 점령하지 못했던 한을 푸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부스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칠 수 있다”며 다윗을 조롱하고 저주했다. 성문만 철통같이 지킨다면 여부스 성 안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여부스의 비밀, 기혼샘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400년 이상 감추어져 있던 대적 여부스의 비밀이 다윗에게 공개된 것이다(참고-살후 2:7, 계 17:5, 7). 그리고 다윗은 수구(水口)로 올라가서 ‘소경과 절뚝발이’를 치고 시온 산성을 빼앗았다(삼하 5:7-8). 성경은 아주 간략하게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만, 현실은 지난(至難)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간헐천 물이 터져 나오기 전에 수직통로를 13미터가량 비집고 들어가서 다시 12미터에 달하는 수직 통로를 올라가야 했다. 만약 수직통로 위에 소수의 경비병이라도 있으면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여부스 성의 유일한 약점인 수구(水口)를 지키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다윗이 수구로 사람을 보낸 것을 전설이나 설화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사무엘하 5:6-10에서는 다윗이 수구를 공략한 비결을 암시하고 있다. 8절에서 다윗은 ‘수구로 올라가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라고 명령했으며, 이 말은 속담이 되었다. 물론 이 절뚝발이와 소경은 여부스 사람들의 비꼬는 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말이 시온성 정복 이후 속담이 되었다는 것은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용사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암시한다. 만약 여부스 군인들이 제대로 수구를 지켰다면 수구를 통한 공격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주한 대로, 말한 대로, 악평한대로 자신에게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부스 사람들의 조롱대로 수구를 지키던 여부스 군인들을 ‘절뚝발이와 소경’으로 만드셨던 것이다(민 14:28, 시 109:17). 덕분에 일사각오 순교정신으로 수구로 들어간 다윗의 용사들은 무사히 수직통로를 기어올라 여부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멜기세덱이 다스리던 ‘살렘’은 ‘평강, 평화’라는 의미이다. 반면 ‘여부스’라는 이름은 ‘짓밟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강의 도시가 오랫동안 짓밟혀 있었지만, 다윗이 여부스의 비밀을 꿰뚫고 그 성을 점령하여 ‘시온’으로 불리우는 역사는 마지막 대적의 문을 차지하고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될 것을 예표(豫表)하고 있다(시 2:6, 사 60:14).
*주: 역대상 11:6에서는 사무엘하의 기록과 달리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겠다”고 하자 요압이 먼저 올라가 두목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관점의 차이로, 사무엘하에는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원수를 치기 위해 자발적인 헌신으로 나아간 무명의 용사들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역대상에서는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고 달려간 요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시온을 점령한 후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바꾸고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이후 시온 북쪽에 위치한 모리아 산의 아라우나 타작 마당은 다윗의 회개의 장소가 되었으며(삼하 24:20-25, 대하 3:1), 솔로
몬 성전의 터가 되었다(대하 3:1). 솔로몬 때 ‘시온’이라는 명칭은 다윗 성과 모리아 산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확장되었으며, 훗날 예루살렘 성이 확장되면서 ‘시온’은 예루살렘 전역을 부르는 표현으로 발전되었다(암 1:2, 시 78:68-69).
예루살렘 기혼샘(2) 히스기야의 수로 확장으로 이어집니다.
글_예루살렘=정디모데 전도사, 삽화_박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