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은
사도행전 7장의 ‘횡단면’과
히브리서 11장 ‘종단면’을 통해서 본
참된 교회의 모습
마 28:18-20, 딤후 4:1-2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2006년 2월 8일 미국 LA 지교회)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사업할 때는 먼저 가족이 화목해야 합니다. 가장은 애쓰는데 가족들이 뒤에서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일이 잘 될 리 없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입니다. 온 식구가 기도하며 뜻을 받들어 줘야 형통하고 발전합니다. 특히 수요일은 ‘족보 기도의 날’입니다. 조상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까지 일일이 기도해 주려면 최소 30분 이상 걸릴 것입니다. 아들딸 위해 기도할 때 간단히 하지 말고 “저희 아들딸이 어떤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은혜 베풀어 주시고, 명철과 지혜와 지식의 신을 보내 주셔서 성경 말씀을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나안 여인 같은 큰 믿음(마 15:28)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 같은 큰 믿음’은 단지 교회 와서 설교 듣고, 노트에 기록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믿을 때 받는 것입니다. 수요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 지정하신 장소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보시고, 기도한 대로 실행하시는 곳입니다(왕상 6장, 요 14:13-14). 나이 40세 넘으면 몸이 시원치 않습니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교회 나와 기도해야 할 텐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세상 일 해봐야 얼마나 오래 하겠습니까? 교회 나오지 않고 집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마 28:18-20)은 주님이 부활하신 뒤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또 바울은 성령을 통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두고 엄히 명하니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횡단면(橫斷面)에서 보는 사도행전 7장
사도행전 7장과 히브리서 11장은 역사를 보는 두 개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위대한 순교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창세기부터 예수님 오실 때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훑어 내려가면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범죄 사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저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고 한 것, 서로 욕설하고, 배척하고, 편 갈라 싸우고, 원망한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러자 설교를 듣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평지 풍파를 일으키는 이 자가 있으면 우리가 교회에서 지도자 노릇 못해 먹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사,장로,권사,집사들이 합심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래전 스데반을 죽인 사건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이 많습니다. “그 놈, 죽일 놈이야” 라고 말하는 죄악이 우리 교회에 없어야 합니다. 자기 말한 대로, 행한 대로, 심은 대로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어느 권사 꼴 보기 싫어. 안 나왔으면 좋겠어.” 하면 천사가 하나님께 즉시 보고합니다. 목사면 뭐하고 장로,집사면 뭐합니까? 거듭났습니까? 경건합니까? 거룩합니까? 그 근처도 못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룩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지옥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다 유황불에 들어갑니다(계 20:12,15).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설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교회가 사랑으로 화목하지 못하면 찬송 부르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기 싫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못질을 해서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말 1:10). 교회가 교회 구실을 못하면 불어 팽개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 경고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역사를 횡단면으로만 보는 사람들
이와는 달리 히브리서 11장은 역대 조상 중에 신앙으로 살았던 인물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굴속으로 도망가고, 핍박받고, 맹수와 싸우면서도 신앙을 지킨 위대한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가족들이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간수하며 애썼던 믿음의 행적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 하나가 나라를 이긴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보는 첫 번째 시각은 인간의 실수와 죄악과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횡단면을 보면서 “그 교회 누가 죄 지었대. 그게 교회냐? 그 교회 나가지 말자”고 말하는 시각입니다. 두 번째는 그런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한결같이 이어져 오는 종단면(縱斷面)을 보는 시각입니다. 횡단면은 가로로 자른 단면이고, 종단면은 세로로 자른 단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직선으로 보면 술 취한 사람처럼 발걸음도 제대로 못 내딛고 비틀대는 타락의 흔적을 숱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에게 절하고, 뇌물을 좋아하고, 당파를 지은 흔적들입니다. 저는 수십 년간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역사를 횡단면에서만 보는 비판입니다. 한 교인의 생활을 보고 교회 전체를 헐뜯습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이 다니면 그 교회는 망했다”고 합니다. 같은 교인끼리도 자기 신앙상태와 맞지 않으면 입을 실룩거리며 쓱 한번 쳐다보고 말을 나누지 않습니다. 여우처럼 곁눈으로 쳐다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피 흘려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양손과 양발에서 피가 다 빠져나갔습니다. 옆구리에 창까지 찔리셨습니다. 저는 625 전쟁 때 총에 맞아 봐서 피가 빠질 때의 고통을 압니다. 온 살을 대나무 창으로 찌르고 칼로 째는 듯한 쓰라림, 쏘는 고통입니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 속에서 “이들이 몰라서 그랬으니 저에게 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짐승 뼛조각이 붙어있는 채찍으로 맞아 등에 밭고랑같은 상처가 파인 가운데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바쳐도 죄 사함 받지 못할 우리를 위해 성체를 깨뜨리고 터지고 찢어지면서 구원해 주셨는데 교회에 와서 무슨 패를 나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말로가 비참합니다. 패당(같이 어울려 다니는 사람의 무리) 짓는 것은 큰 사탄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 편, 저 사람은 저쪽 편’ 하고 있으니 교회가 잘 되겠습니까? 자기 신앙에 맞지 않는다고 마귀로 취급하고, 개인 몇 사람을 가지고 교회 전체를 매도해서야 되겠습니까?
문제투성이 고린도 교회를 감싸안은 바울
의인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책잡힐 일이 있습니다. 성자(聖者)도 오점이 있습니다. 사랑의 안경으로 봐야 사랑스럽지, 원망과 저주와 미움의 안경으로 보면 모두 미운 사람입니다. 털면 먼지 안 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예수님 잘 믿어도, 마땅치 못한 일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꿰뚫어 보면 빛을 찾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심지어는 모친과 자식의 근친상간까지 있었습니다. 간음도 저질렀습니다. 툭 하면 편갈라 싸우며 “그쪽 모이는 곳에는 가지도 말고 헌금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아궁이에 불 때듯 간이 타고 마음이 바싹 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걸머지고 하나님 앞에 도고(禱告)의 산 제사를 드린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 없던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기 위해 하나 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성도로 부르심 받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합니다”(고전 1:2, 고전 6:11)라고 썼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입에 못 담을 죄악을 저지르고, 당파 만들어 싸우고, 교회에 안 나오기까지 한 그들을 ‘거룩하고, 성도로 부르심 받은 고린도 교회 여러분’이라고 불러준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나쁜 마음을 먹었던 사람들조차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할 때 사랑의 도가니 속에 가슴이 얼음 녹듯 녹아서 큰 회개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보십시오. 바울은 교회의 역사를 보는 눈이 달랐던 것입니다. 개에게는 개똥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잘 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외칠 때 3천 명이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는 장면을 보십시오.
교회는 큰 강과 같다
이 교회는 큰 강 물줄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강물이 도도히 흘러갑니다. 막을 자가 없습니다. “어디 잘 되나 보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잘 되게 돼 있습니다. 은혜의 창파(滄波) 속에 강폭이 넓을 때는 흘러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여유 있고 편안하게 내려갑니다. 훌렁 뛰어들어 수영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문제 거리가 생기면 강이 좁아집니다. 내려가는 소리가 시끄러워집니다. ‘내가 왜 교회에 나왔나’ 싶어집니다. 소낙비가 쏟아져 물이 흐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바위에 부딪치면 ‘철썩, 쾅’ 소리도 심합니다. 교회도 당파 싸움 때문에 소리가 납니다. 그런 게 꼴 보기 싫다고 옆으로 새서 ‘쉭’ 하고 빠르게 흘러가기도 합니다. 남들 꼴 보기 싫다고 축도도 하기 전에 ‘쉭’ 빠져나가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물이 흘러내려가다 배가 제자리에서 돌기도 합니다. 마음이 정착되지 못하고 ‘내가 이 교회에 발을 붙여야 하나?’ 눈치 보다 다른 교회를 기웃거리고, 거기서도 시원치 않으니 ‘뭐니 뭐니 해도 여기’ 라면서 다시 오지만 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처 없이 10년, 15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처가 없습니다. 사는 맛도 없고, 남들 보는 눈 때문에 헌금도 마지 못해 드립니다. 강 물줄기 속에서 그런 일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았습니다. ‘후웁’ 하고 빨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강 물줄기가 우렁찬 찬송과 기도와 회개 속에 도도하게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데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낮은 데로 내려갑니다. 겸손, 또 겸손입니다. 참으로 교회 생활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원망하는 죄
성도 여러분, 원망하는 죄(고전 10:10)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4대째 믿고, 수십 년 믿는 집안이라 해도 원망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원망했습니다. 장정만 60만 3,550명이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둘을 뺀 60만 3,548명이 꽁알꽁알 대며 원망했습니다. 이들 때문에 하나님이 속 썩고 근심하신 것을 말로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광야에 친 장막 속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쑥덕댔습니다. 장막 속에서 한 말인데도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신 1:27). “들은 대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민 14:2, 14:24-38). 결국 출애굽 38년 후 세렛 시냇가에 천사를 보내셔서 모두 죽이셨습니다(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중(陣中)에서 다 멸절되었나니”(신 2:14). 여호수아와 갈렙의 집안이라도 봐 주시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은 단 둘만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거울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믿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못된 말로 “당신, 정신 차려! 그 목사가 누구 편인줄 알아?” 할 때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노하셨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하고 말하던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상하고 격동했습니다(히 3:17-19). 평강교회에서는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누가 교회를 욕하면 성도들이 ‘왜 은혜스런 교회에 와서 그러느냐?’고 말을 못하게 합니다. 아무리 사람의 말로 떠들려고 해도 듣는 사람이 “그러지 말고 기도합시다” 하니 겁이 나서 말을 못합니다. 교회는 그래야만 합니다.
교역자와 장로에 대한 권면
성도 여러분. 나를 미워하고 내 가족과 사업을 망친 원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원수가 주리면 먹여주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네 죄도 사하시기 않겠다고 하십니다(마 18:35).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역자는 어느 교인 하나도 미워하고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벌써 스스로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닌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 받은 종인데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 회개할 때 이내 마음이 풀어지고,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권면하게 되고, 따뜻하게 밥도 같이 먹고, 그러면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장로는 교회의 거울입니다. 정말 겸손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경건의 연습을 정말 많이 해야 합니다. 주일에도 나오지 않는 장로가 어떻게 장로입니까. 예배에 못 나오는 날도 헌금만은 다음에 함께 드려야 합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는 새벽예배에 나오지 않는 장로는 장로의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기도 잘 하고, 생활이 경건하고, 교인들에게 모범이 돼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지도자가 돼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가 다 보조를 맞춰서 군가를 부르며 우렁차게 행진해 사탄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강의 역사
저는 수십 년 동안 강의 오랜 역사를 담당하며 함께 흘러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이사를 가고, 잠깐 들락날락하다 아주 안 나오는 사람도 있고, 또 새 식구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변화와 굴곡의 역사 속에서 나의 역사가 평강교회 교인들과 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같이 평강교회를 받들다가 떠난 영혼들을 생각할 때는 애처롭기도 합니다.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이는 교인들입니다. 교인들이 역사를 새롭게 바꿔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울목을 흘러가는 강물처럼 역사의 최전방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담당하고 있다는 엄숙한 현실 앞에, 우리는 하나가 돼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소리쳐 봐야 100년을 살지 못합니다. 70-80년 살고 나면 천국에 갈 텐데 거기서 다 만나야지, 누구는 가고 누구는 못 가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할 때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8) 역대 선지자들이 매 맞고 쫓겨나고 굴속에 숨으면서 씨 뿌리고 가꾸고 수고해 아름드리 나무처럼 길러놓은 결실을 우리는 가서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예수님 믿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수고의 결실에 참예함으로써 역사의 일익을 담당하면 됩니다. 조상들이 뿌린 씨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의 책임입니다. 현재를 사는 자는 과거에 대해 부채(負債)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는 열매를 물려줄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씨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돼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성경을 1700번 읽었습니다. 성경적인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책임이 없습니다. 들락날락할 뿐입니다. 교회 와서 화장실이나 쓰고 물만 사용하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나그네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남겨진 일을 믿음으로 해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가 받음으로써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룩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고 우리의 소원입니다. 교회의 의무도 직분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고, 기분 나쁘면 “너희끼리 해! 나는 그런 교회 안 나가” 하는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평생 교회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먼지만 피우는 인생입니다. 낡은 자동차 엔진처럼 시꺼먼 연기만 내는 사람은 인생의 비극이고 참극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정착한 교회의 주인입니다. 무엇이든 근검해서 아끼고, 거미줄 친 곳은 청소하고, “저기는 페인트칠 해야겠는데” 하고 말만 하지 않고, 칠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교회의 거치는 자(고전 10:31-33)가 되지 마십시오. 방해꾼이 되지 마십시오. 교회를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말할 때나 일할 때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골 3:17, 벧전 4:11). “있다가 우리끼리만 모여. 저 장로는 모르게 해” 하며 편 가르지 마십시오.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될텐데 왜 한 교회 집안 식구들끼리 편을 가릅니까. 성도를 만나면 다 좋다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나는 집사님이 좋아” 하면서 서로 아끼고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도 서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군중들이 돌로 치려 할 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영광 가운데 서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행 7:56). 스데반이 돌에 맞으며 본 예수님은 ‘서서 계신 예수’였습니다. 자식이 속 썩이면 부모는 편안히 앉아있지 못합니다. 속이 타서 방문을 열어 젖히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가슴을 태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서 계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팔자로 편안히 앉아 있고, 어디 가서 놀고 먹고 마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이 뜻을 안다면 미안해서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내가 철없고 성경을 몰라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주님 좌정하시고 제가 서겠습니다.”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서서 계신다는 것은 ‘행동 개시’를 뜻합니다. 서 있으면 명령을 받을 때 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일하시는 예수’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말씀대로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만이 일하는 예수를 쳐다볼 수 있습니다. “활동하는 예수”를 말합니다. 우리든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는 신앙상태가 돼야 합니다. 교회 일 하자고 하면
“내일은 1년에 한두 번 있는 약속이 있는데 한번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하는 것은 누워있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종단면(縱斷面)에서 보는 히브리서 11장
교회 역사를 횡단면으로 본 사도행전 7장과 달리 히브리서 11장은 교회의 역사를 종단면에서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시대마다 열매를 맺어 온 신앙의 물줄기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진정한 예물을 바친 아벨(히 11:4), 아직 보지 못한 역사지만 방주를 예비한 노아(히 11:7),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히 11:8), 일시적인 향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통과 굶주림과 환난을 받는 것을 낙으로 여긴 모세(히 11:25)의 역사가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한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삶을 통해 참다운 고향을 찾은 인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을 보시고 한 성을 예비해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 말씀 볼 때 정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우리도 이렇게 교회 생활해야 되겠다! 앞만 봐야 되겠다!’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는 목사파,장로파,권사파,집사파가 없습니다. 목사는 장로 편, 권사 편, 집사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뜨거운 믿음으로 성도 전체를 하나로 품고, 똑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기도해 주는 것이 진짜 목사입니다. 교인들 입에서 “우리 목사님은 어느 장로에게 기울어졌다.”, “어느 권사님은 누구한테 기울어졌다”는 말이 나오면 교회는 깨집니다. 제가 오늘 이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에 앞으로 시련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단결되면 간단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 생활한 것보다 더 쉽습니다. 중심을 바로 하십시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하의 말씀처럼 사람에게 비위 맞추고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십시오.”
사도행전 7장과 히브리서 11장을 합쳤을 때
사도행전 7장과 히브리서 11장을 합치면 참된 교회의 모습,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 전파에 힘쓰라”(딤후 4:1-2)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에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딤후 4:1-2)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마지막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가 마음을 합치기만 하면 전무후무한 놀라운 역사가 모두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항상 말씀 충만, 기도 충만, 은혜 충만, 주님의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십시오. ‘누구는 좋다, 누구는 나쁘다’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좋고, 밥이라도 먹이고 싶고, 같이 얘기하고 싶어야 합니다. 한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고, 오빠 같고, 누나같이 여긴다면 그 얼마나 보람 있고 살맛 나고 자녀가 잘 되고 모든 일에 형통하겠습니까. 이제부터 정말 당파는 없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2:7-9) 당을 만들면 영의 환난과 곤고가 생기니 육신의 생활이 엉망이 됩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돈을 모아도 다 흘러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하시고 불어 팽개치십니다.
예수님의 남은 역사를 믿음으로 담당했던 골로새 교인들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사상과 이념과 신앙만 갖는다면 이 교회에 불이 붙습니다. 소방차도 끄지 못합니다.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이 교회가 모든 평정을 이룰 때까지 떠나지 않고, 늘 붙잡아 주고, 역사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오늘까지 잘못된 것 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 교회 나가기 싫은 마음이 들어도 그 자리를 마귀가 채우게 할 수는 없다는 믿음으로 교회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전 교인이 새롭게 굳은 결심과 각오를 통해, 하나님 앞에 마지막 헌신,봉사하며 천국 문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서 천국에 입성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