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셨나
예수님은 왜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셨나
성경 전체의 압축인 십계명은 대신(對神) 계명(제1-4계명)과 대인(對人) 계명(제5-10계명)으로 구분된다. 그중 대인 계명의 첫 말씀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출 20:12, 신 5:16). 인간 생활에서 지켜야 할 가장 첫째 계명이 효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카베드’(כָּבֵד)로, ‘무겁다, 존귀하다’라는 의미로, 주로 하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단순히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 부모를 섬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의 범위를 육신의 부모에서 영적 스승(왕하 2:12, 13:14, 고전 4:15), 그리고 하나님에게까지 확장해야 함을(렘 3:4-5, 사 63:16, 64:8)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열 말씀을 완전히 이루셨다. 창조주이시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지만 제5계명을 이루시기 위해 피조물인 어머니 마리아에게 효도하셨다. 예수님의 효도는 제5계명을 완전하게 이루신
‘절대 효도’이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인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두 번 부르신 것을 들어 예수님이 불효자라고 말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여자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γύναι)를 ‘여사님!’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궁색하게 변명하지만, 실상 이 단어는 단순히 여성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어서 설득력이 없다(마 15:28, 눅 13:12, 22:57, 요 4:21, 8:10, 20:13, 15, 고전 7:16).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을까?
1.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효도
요한복음 2:1-12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사건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이 나온다. 잔치에 준비했던 포도주가 동나자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알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퉁명스럽게 투덜대는 대답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효도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당신의 신성(神性)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깨닫게 하셨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배를 통해 태어나셨지만, 부정모혈(父精母血)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시다. 마리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길로 마리아가 쓰임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는 구절에 ‘낳다’(헬라어 ‘겐나오’)의 능동태 ‘에겐네데’가 아닌 수동태 ‘에겐네센’(ἐγέννησεν)을 사용했다. ‘마리아가 낳았다’는 표현 대신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낳다’로 표현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천사에게 직접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당사자였다. 그러나 3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점차 그 기억이 무뎌지고 어느덧 다른 아들을 대하듯 예수님을 대하고 있었다. ‘여자여’라는 음성은 마리아가 잊고 있던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구원의 일갈(一喝)이자 참 효도의 외침이었다. 또한 “여자여”라는 부름 뒤에 말씀하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며, 십자가를 통해 사망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이며, 그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마리아는 아들의 효도를 통해 절대 순종을 회복했다.
예수님의 일갈은 순간적으로 마리아를 회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한다. “내가 아들에게 시켰으니까 너희에게 뭔가 시킬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라는 권면이다. 예수님께서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을 하든, 시시한 말씀을 하든, 아예 포도주를 허락지 않으시든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외쳤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과도 같다(단 3:18). 예수님의 참 효도를 통해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자세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참고-눅 1:38).
2. 공생애를 마무리하는 예수님의 효도
요한복음 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공생애를 끝내는 순간에 또 한 번 “여자여”라는 말씀으로 효도하셨다.
‘여자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라고 부르셨다. 자녀가 넘어지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인데, 온몸에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창자가 찢기는 심정 가운데 머릿속에 그저 아들 생각밖에 없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애틋한 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고통스러워하는 아들로 보아서는 마리아에게 구원의 문이 열릴 수 없다. ‘여자여’라는 말씀은 다시 한번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참 신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했다. 어머니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십자가상 세 번째 말씀은 그 자체로 효도의 완성이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은 여자의 후손 언약을 성취하신 말씀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리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른 뒤 자신을 ‘아들’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담 타락 직후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해 약속하셨던 창세기 3:15의 위대한 언약이 성취됐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오신 여자의 후손이셨던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시는 것만 보였지만, 실상 그 순간은 사탄의 머리가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사탄이 이를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2:6-8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제자에게 하신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말씀은 절대 효도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마리아를 육신적으로 만날 수 없음을 아셨다. 이에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의탁하셨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친을 의탁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육신이 있는 모습으로 역사하셨지만 인간과 같은 육신이 아닌 완전히 회복된 신령한 몸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을 알리고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의탁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효도는 참 성경적인 절대 효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효도로 시작하고 효도로 마치셨다. 예수님은 성부(聖父) 하나님께도 절대 효도하셨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모두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요 17:4-5). 누가복음 22:39-44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며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런 효도의 모습을 보이신 것은 ‘부모 공경’이 십계명에 기록된 영원불멸의 말씀이요, 오늘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육신의 부모만이 아닌 말씀으로 양육하며 복음으로 자녀를 해산한 아버지가 있음을 가르친다(고전 4:15). 더 나아가 예수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아람어로 ’아빠‘라는 뜻)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롬 8:15, 갈 4:6). 우리는 육신의 부모를 구원의 복음으로 모시고 영적인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한 성화(聖化)를 이루어 궁극적으로 우리의 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효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98년 4월 12일 주일2부예배 박윤식 원로목사 설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예수님’을 토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글_정디모데 전도사, 삽화_박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