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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날마다 ‘진실’로 살았느냐

2022.12.29 17:34

우리의 삶을 날마다
‘진실’로 살았느냐

고린도후서 1:18-20

창세기 2:1-3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첫째, 복 주시고, 둘째,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왔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복 주셨다는 말씀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4 볼 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화평을 좇지 않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니 상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단 마귀들이 하는 얘기죠. 교회 장로회나 남·여 선교회나 청년회나 학생회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1년도 아니고 오늘날까지 몇십 년을 예수 믿고 있는데, 아직도 말씀대로 믿지 못합니다. 진실이 없습니다. 전부 거짓입니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따지고 ‘저 사람 상대하지 마라, 너는 내 편이다.’ 하는 것은 어린애들 소꿉장난 같은, 철없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부터 사람까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너무 좋으셔서 ‘내가 심히 좋았더라’ 하셨는데, 또 안식일, 그날에 복 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화평을 좇지 않고 거룩함이 없으면 누구든지 주를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천당 가기는 애초에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걸 먼저 아셔야겠습니다.

무좀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려운지, 발을 찍어 팽개치면 좋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정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 욕심 못 버린다고들 하죠. 무좀도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하냐면, 오늘 제목이 ‘우리 삶이 날마다 진실한가?’입니다. ‘진실’은 원어로 볼 때 ‘아멘’입니다. 대표기도 때나 목사가 축복할 때,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마음속에 ‘아멘, 아멘’ 하잖아요. 옳기 때문에 거짓이 없거든요. 우리의 삶이 날마다 진실했느냐, 즉 ‘아멘’이 있었느냐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을 상대방이 받지 않으면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질까 봐, 말씀하면서 마음의 손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하신 것은 인류들이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해서, 믿음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있지만 요한복음에 시종일관 나타나고 있는데, 요한복음 1:51 볼 때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아멘, 아멘’ 하신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오래 예수 믿고 목사, 장로, 집사가 됐다고 해도 오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말짱 헛것입니다. 삶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아멘’이 없는 삶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건성으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구원받았으면 첫째,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아멘’ 해야 합니다. ‘집에 할 일도 많은데, 속상한데 내가 교회에서 일을 해야 되나?’ 그러면 ‘아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본문 20절을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 아닙니까. 말씀 앞에 ‘예’밖에 없죠. 천번 만번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해 가면서 살려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아들딸이 죽을 자리에 누가 대신 죽어 준다면 잊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이제는 두렵게 믿어야죠. 나이가 몇입니까. 30 넘고 40, 50 됐죠. 인골(人骨)을 쓰고 머리를 하늘로 들고 사는 사람 아닙니까. 철이 없을 때는 죄짓습니다. 그러나 말씀 받고 은혜받고 성령을 받았다면 진짜 하나님 앞에 양심상으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진실해야 합니다. 겉치레만 하면 안 됩니다. 남을 도와줄 때도 주의 이름으로 해야죠.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게 되면 ‘그 자식, 나는 열 번 대접했는데 나한테 짜장면 한 그릇도 안 산다.’ 그런 말이 나옵니다. 벌써 거짓된 거예요.
다윗도 그렇게 생활하다가 마지막 죽기 직전에 깨달았습니다. ‘저의 재주로 재물을 모은 줄 알았더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인색함 없이, 아낌없이 감사하므로 바치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백한 것이 역대상 29:10-14에 기록돼 있잖아요. 그리고 70살에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남편 죽이고, 자식 죽이고, 집안 망치고 쑥밭으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진로를 막고 사업체를 망가뜨리고, 거짓말로 인감을 도적질해서 땅을 팔아먹었다면 용서할 것 같습니까? 사람으로서는 용서 못 합니다. 상종 안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사기꾼, 도둑놈 같은 자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밥맛이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 보세요.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4). 그렇게 못 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멘’이 없는 것입니다. 밤낮 애써도 생활이 말라 꼬드러진 무 조각 정도도 안 되는 거예요. 장사가 돼야 생활을 하죠. 집에 화평이 없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세금 포탈했다고 고발해서 회사가 쑥밭이 됐는데, 누가 그랬는지 알면 그놈 상대하겠습니까?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롬 12:20), 헐벗거든 옷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 2년 반 이상, 3년 다 돼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란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4-26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진실하지 못한 분 많이 있죠. 원수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먹여 줬습니까? 마태복음 18장 볼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해 줍니까?’라고 하자 ‘아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줘라.’ 하시면서 ‘너희가 남의 허물, 죄를 용서치 아니하면 하나님도 네 죄를 용서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21-22, 35). 얼마나 무섭습니까.
저한테 ‘저놈, 교회를 헐뜯고 고발하는 놈입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는 용서가 다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염을 뽑고, 때리고, 가래침 뱉고, 발길질하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고 채찍으로 쳤습니다. 이스라엘에 가 보면 알지만 당시 채찍은 세 가닥, 어떤 것은 아홉 가닥으로 돼 있습니다. 한 번 치면 쇠가 살에 팍팍 박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얻어터지고 맞고 째지고 터지는데(사 53:5), 묵은 땅을 쟁기로 갈 때 고랑이 생기듯이 예수님의 온몸에 밭고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시 129:3). 그러한 상황 속에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죄 없는 성자 예수님이 피를 쏟으실 때, 제가 총 맞아 봐서 알지만, 피가 나오면 온몸이 저리고 춥고 무지하게 아픕니다. 양손 양발, 가시관, 옆구리 창에 찔린 자리가 째지고 피가 나오는 와중에 “아버지, 저들이 몰라서 저한테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 그러한 사랑, 너그러운 마음을 받은 우리입니다.

오늘날까지 예수 믿으면서 ‘내 삶이 진실했던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진실’은 ‘아멘’입니다. 이것도 없이 믿기는 뭘 믿습니까?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도합니까?
아브라함은 독자를 바치라는 말씀까지 순종했습니다. 가짜로 순종했습니까? 아내한테 말하면 가만있겠어요? 100살 돼서 얻은 아들인데 하나님이 사람 잡아먹는 백정이냐고 하면서, 이삭에게 아버지 따라가지 말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럴까 봐 아침 일찍 종한테 나귀에 장작 싣게 해서 삼일 길 식량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가는 동안에 아브라함도 사람인데 마음에 고민이 없겠습니까. 시험입니다. 산에 다 가서 설상가상으로 아들 이삭이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물을 때, 아버지 마음을 비수로 찌르는 것이죠. ‘바로 너다’라고 못 하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고 하고 올라갈 때, 제가 가 봤지만 몇 시간 걸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창 22:1-12).
우리는 그렇습니까? 애가 아프기만 해도 병원 가야 한다고 교회 안 나옵니다. 그런 신앙 가지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신앙의 무게가 있어야죠. 아브라함 같은 삶을 산 다음에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달라는 기도를 해야죠.
아브라함은 날마다 새벽 기도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 세우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집을 지어 드렸는데, 복 달라고 안 해도 주십니다. 우리의 심장 폐부, 세포까지 살피시고 다 아시는 분입니다. 성경 볼 때, 정성을 다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할 때,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 주신 것 보세요(학 2:18-19).
그런데 교회 지으라는데 어떤 교인들은 협조 안 합니다. 학개 1장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아. 너희 집은 도배하고 고치고 장안의 큰 집으로 이사 가면서 내 집은 황폐한 그대로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것마다 전부 안 되고, 돈 벌어서 주머니에 넣지만, 교통사고 나고 애가 속 썩이고 병들어서 치료받고 하느라 그 돈 다 달아납니다.
학개 1:4-9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 찌니라 …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여러분이 오늘 삶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하세요. 후회가 없습니다. 누구 밥 사 주고 나서 ‘어휴, 괜히 그런 사람 만나서 돈 썼다’ 그러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대접하세요. 또 주의 이름으로 일하세요. 범사에 감사가 있는 곳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에 ‘아멘’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야죠.
오늘 설날이죠. 서울에서 전화 와서 뭐 드셨냐고 묻길래 ‘아직 먹지 않았지만, 얘기 들으니 떡국하고 만두 한다고 그러더라’ 했습니다. 남·여 선교회, 청년회, 학생회, 장로회 다 전화 왔어요. 고맙잖아요. 제가 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전화하겠죠. 전화 올 때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축복 아닙니까.

‘진실하다’는 히브리어로 ‘아만’(אָמַן)입니다. 아멘의 의미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 이하 말씀 볼 때 예수님은 자기 마음을 비우셨다고 했죠.
빌립보서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빈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은 고향 사람이다, 형제다, 가족이다, 동창이다 해서 먼저 챙기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 동창, 부모 형제나 살인강도, 죄인, 원수나 사랑이 똑같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구세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무슨 마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장사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마음을 품고 교회 생활하고 있습니까? 예수가 안 계시기 때문에 누구는 싫다, 누구는 좋다 하고, 같은 교인끼리 만나도 인사 안 하고 홱 돌아섭니다. 참 문제예요.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고 참되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분의 마음이 ‘아멘’입니다. 그 삶이 복 받아요.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깔 내면 되는 법이 없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머리가 띵 해집니다.
나가나 들어오나 복을 받아야 될 텐데, 시편 121:8, 신명기 28:5-6 말씀 보세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손발에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복 받는 사람과 악수하면 그분도 복 받습니다.
시편 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신명기 28:5-6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렇게 살아야 근심 없는 재물이 들어올 것 아닙니까(잠 10:22). 돈이 들어와도 근심하고 ‘이거 어떡하나…’ 하다가 돈이 나갑니다. 돈이 들어오면 은혜 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뜻을 위해 맡기셨구나. 아멘’ 할 때 하나님께서 또 쏟아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다지’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모든 생활에 ‘노다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땡전 한 푼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심, 걱정이 없었습니다. 빵 한 조각이든, 누구한테 얻어먹든 어쨌든 먹잖아요. 그리고 결말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고후 6:10).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만물이 다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6 볼 때 ‘주로 말미암아 나갔다가 주로 말미암아 다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은 ‘진실’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고 걱정이 없고 다 맡기는 신앙,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부부의 사랑도 진실하고, 자녀 사랑도 진실해야 됩니다. ‘진실’은 ‘거짓 없는, 참으로, 정말 확실하게’라는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4 볼 때 혈혈단신 75세, 늙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나아갔습니다.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눈물로 기도하고 제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그때마다 계시를 주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 왕한테 아내를 뺏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아내가 너무 미인이라, 이방에 가서 아내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때려죽이고 아내를 차지할까 봐 걱정돼서 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이 뺏어서 취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얼마나 야단치셨습니까. ‘그 여자 건드리면 네 왕궁뿐만 아니라 집안이 다 박살 난다. 그분은 선지자다. 남편 있는 아내야!’ 하시자 애굽 왕이 놀라서 손목도 잡지 못하고, 옆에 가지도 못하고, 벗지도 못하고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서 “왜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내가 죄짓고 벌 받게 하느냐?” 하면서 많은 은금 보화, 재물을 달구지로 싣고 갈 정도로 잔뜩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빈털터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셔서 재물을 얻어 가지고 나온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창 12:10-20, 20:1-18). 그 후에 아브라함이 심는 것마다, 하는 일마다 풍성한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24:34-35을 볼 때, 아브라함의 몸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 될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한테 “하나님께서 우리 주인에게 많은 재산과 종들을 주시고 식량과 말도 많이 주셔서 큰 부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딸 결혼 문제를 직장의 일꾼한테 맡기겠습니까? 보잘것없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한 사람한테 자식의 배우자를 소개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말할 때 ‘아멘’, 진실이었습니다. 창세기 24:49 보세요.
창세기 24:49 “이제 당신들이 인자와 진실로 나의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고하시고 그렇지 않을찌라도 내게 고하여 나로 좌우간 행하게 하소서”

창세기 24:1에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사(凡事)는 시계추가 ‘똑딱’ 할 때 ‘똑’ 하는 순간, ‘딱’ 하는 순간만큼도 빈틈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 발걸음, 손으로 하는 일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예’였습니다.
아들딸이 아파 죽겠다는데 그냥 두고 교회 오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오죠. 우리는 못 옵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교회 와서 앉아 있어도 멍하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 가운데, 머릿속에 ‘얘가 밥은 먹었나, 죽 끓여 먹었나. 병원에 데려가야 될 텐데…’ 하는 생각뿐이니, 복 받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교적인 믿음입니다.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들을 바치는 순서를 다 대주시고 삼일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작심삼일입니다. ‘예’ 했지만, 가다가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끝까지 승리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승리했습니다.
스무 살 넘은 아들을 100살 넘은 아버지가 묶으려고 할 때, 요새 같으면 도리어 아들이 아버지를 묶어 가지고 장작불에 올려 놨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널 묶으라고 하셨다. 나는 네 목을 쳐서 장작불에 올려서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할 때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하고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격이고 이삭은 아들 예수님 격 아닙니까. 미리 다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서 이삭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급하시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들한테 손대지 말라.” 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브라함 믿음이 건성이었습니다. 창세기 22:12에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17-18을 볼 때, 그 아들을 통해서 대적의 문을 다 작살내고 구세주가 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창세기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우리가 예수 믿어도 정말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헌금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작정했으면 그대로 딱 하면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왔는데 어디 쓸 데 있다고 깎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제가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이나 맥추절에 아들 셋 이름으로 헌금합니다. 그런데 마음 가운데 내 자식들만 생각하면 되겠나 해서 자식들과 교인 전체를 위해서 바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천만 원, 500만 원이 적은 돈입니까? 쓰지 않고 모아 뒀다가 바치는 거예요.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골 3:17). 예수 이름으로 하게 되면,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이죠. 사도 바울 보세요. 40에 하나 감한 매, 39대씩 다섯 번을 맞았습니다. 그렇게 맞으면 계속 믿을 사람 없습니다. ‘그놈의 교회 다니다가 39대씩이나 얻어터졌는데…’ 그러죠. 그리고 일주야(一晝夜) 바다에 빠지고 동족들의 공갈 협박, 또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길가에 집어 던졌죠(행 14:19). 광야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말이 광야지, 생각해 보세요. 몇십 리, 몇백 리 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밤에도 가는 거예요. 낯설고 무섭고 늑대들, 짐승들이 울고 있는데 길이나 제대로 있습니까? 공포감 속에 숲을 헤치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간 것이 한두 번입니까(고후 11:23-28). 요새는 누구한테 어디 다녀오라고 하면 “지난번에 갔다 왔는데 저를 또 보내십니까? 이 교회에 저밖에 없습니까? 다른 사람 시켜 보세요.” 눈 똑바로 뜨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지 못하고, 헐벗고, 춥고, 배고팠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전도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이 ‘내가 다른 사도보다 수고를 많이 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했다.’고 했습니다(고전 15:10). 진짜 어디를 가나 ‘아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보세요. 하나님께서 ‘너, 영광 보좌를 버려. 천대받고 매 맞고 쫓겨 다니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야 되겠어.’ 하실 때,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0:28 봐도 대속의 제물로서 ‘아멘’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볼 때도 많은 제자와 사람들에게 ‘내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두 번 말씀하셨습니까(요 6:38-39, 12:49-50).

굶었죠, 헐벗었죠. 30살밖에 안 된 젊은 예수님이 뼈만 남은 데 살이 겨우 붙어 있고 얼굴이 새까맣죠. 안식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비위를 맞춰야 할 텐데, 도리어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치를 보시고 ‘그래, 그래.’ 하면서 하실 말씀 다 못하시고 말이죠. 요한복음 3:12, 16:12 말씀 봐도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다. 밝히 얘기해야만 한다.’ 하셨지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감당 못 해요. 그래서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깜짝 놀라고 믿지 못하고 나가자빠질 판인데, 하늘에서 가져온 비밀을 말하면 믿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다 못 하시고 마지막에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지 못한 말씀, 말세에 대한 비밀을 다 대주신다고 하고(요 14:26, 15:26, 16:13)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하나님 아닙니까. 인격적인 신이죠.

설날에 고향 찾아가 보세요. 어머니 늙으셨죠, 아버지 병드셨죠, 형제는 암이니 뭐니 그렇죠. 매년 찾아가 봐야 마음이 편합니까? ‘둘째 동생은 사업하다가 쫄딱 망했다. 형편 괜찮으면 좀 도와줘라. 누나는 시집갔다가 쫓겨 왔다. 매 맞아서 얼굴 부은 거 봐라.’ 전부 우수사려, 근심 걱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갈 하늘나라는 그런 근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異域萬里) 미국에 와 가지고 설날을 맞이하면서 눈 지그시 감고 고향 생각하겠죠. 해 봐야 다 변했습니다. ‘고향에 찾아와도’라는 최갑석 노래 있잖아요. 가사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뒷마을 순이는 어디 갔느뇨’ 자기 좋아하는 사람한테 시집갔겠죠. ‘말 마라. 그 집 속아서 증권인가 뭔가 하다가 다 날려 먹고 알거지 됐어. 그 잘살던 사람들이 다 풍비박산돼서 어디로 갔는지 낯짝도 보이지 않더라’ 그런 말 듣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늘나라에는 그러한 근심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렇게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슨 팔자로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미국에 와서….’ 한탄하죠.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올 때까지 일해도 잘살지 못하고, 밤낮 벌어 봤자 집세, 자동찻값, 휘발윳값으로 다 나가고, 또 교회 생활을 하니 십일조 바쳐야지, 안 바치면 도둑놈이라고 하니까 양심에 가책되죠. 차에 시동 걸 때 엔진 소리가 ‘달러(dollar), 달러, 달러’ 그렇게 들리잖아요. ‘기름값 내고 뭐 내고, 주일 헌금이 되겠나…’ 제가 들은 얘기입니다. 말씀에 은혜받고 난 다음에서야 아낌없이 바치게 된 것이지, 전에는 수요일에는 교회 올 생각도 안 했다고 합니다. LA 교회의 권사님 얘기입니다. 은혜받기 전에는 정말 짠돌이였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우리는 ‘아멘’이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아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이죠(마 1:21). 원래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나 하늘에 계시나 ‘아멘’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3:14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다고 했습니다(고후 1:19-20).
성경에 약속된 말씀입니다. 믿고 하나님 말씀 앞에 ‘예’ 하면, 복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솔로몬이 기도 하면서 지혜를 구할 때 하늘의 복과 땅의 복, 원천의 복, 부귀영화를 주시지 않았습니까(왕상 3:9-14). 그러한 복이 들어옵니다. 천천만만의 복 이상입니다.
요한계시록 17:14 말씀 보세요. 끝날에 하나님께서 진실된 사람을 끄집어내신다고 했습니다. 만일 올랜도에 태풍 분다, 다 불바다 된다 할 때, 하나님께서 진실히 믿는 사람은 미리 ‘너는 나와야 되겠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실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가지고 예수께 붙여 주고 예수와 함께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거리고 한편으로는 감사하지만, 가르치는, 양을 치는 목자들이 자기만 옳다 하면 뭐하겠습니까. 양들, 교인들이 진실해야죠. 요한계시록 17:14 잊지 마세요. 진실한 사람을 끄집어내십니다. 불러내십니다. 진실치 못하면 마지막에 낙동강 오리알입니다. 다 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진실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믿는 사람들은 진실하지 말라고 해도 진실해집니다.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라는 뜻이죠. ‘아멘’이라고 할 때 ‘예! 기도한 대로,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꼭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원한다고 할 때 소망을 둔다는 것이죠.

탕자가 ‘내 아버지 집은 부자다. 돼지 우릿간에 들어가서 쥐엄 열매를 먹고 있으니, 이러다 내가 굶어 죽겠구나. 아, 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면서 회개, 결단하고 돌아간 것 아닙니까. 탕자가 ‘내 아버지 집은 먹을 것이 많다. 아들은 고사하고 그 집 품꾼의 하나라도 되어야겠다.’고 할 정도로 아주 밑바닥 인생이 됐죠.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어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구나!’ 하면서 아버지의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신을 신기고, 옷을 입히고, 소를 잡으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을 진탕만탕 먹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악단을 불러서 음악 소리가 납니다. 큰 아들이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고 종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묻습니다. 당신 동생이 돌아와서 그렇다고 하니까 뿔이 났어요. ‘나는 아버지 재물을 없애지 않고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예’ 했는데 나한테는 염소 새끼도 안 주면서, 재산 다 탕진한 자식한테 이게 뭐냐?’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한테 심통을 부렸습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왔어.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기쁘냐.’라고 했죠(눅 15:11-32). 큰아들 마음과 아버지 마음이 하늘 땅 차이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 망하고 안되길 바랍니까. 아무리 심통을 부려도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까 집 바깥에 있는 탕자보다 집에 있는 탕자가 더 무서운 거예요. 집 바깥의 탕자는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집 안의 탕자는 회개 안 합니다. 먼저 믿은 분들, 조심해야 합니다.

마리아 보세요. ‘내가 처녀인데,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아들을 낳는다고? 허락 못 해요.’라고 할 수 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예, 제가 주의 것이죠. 뜻대로 하옵소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으시고 성령을 보내어 남자 없이 아기 예수를 낳게 하신 것 보세요. 보통 일입니까. 쉬운 게 아닙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눅 1:38). 이 순종이 ‘아멘’입니다.
우리의 삶이 직장에나 가정에나, 차 타고 어디 가나 언제나 ‘아멘’이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 말씀(고전 10:31)에 ‘예! 아멘, 순종하겠습니다’ 하면 집안이 잘됩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요.
‘아멘’은 동의의 표시입니다. 누가 ‘형님, 선배님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면 ‘나같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그럽니까? 동의해 줘야죠. ‘나 같은 사람 된다고? 왜?’ 물을 때 ‘멋있고요. 교회 생활하는 것 볼 때 부러워요.’라고 하면 ‘그래? 그럼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는 나를 위해 기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동의의 삶입니다.
예배드릴 때 큰 목소리로 기도하잖아요. 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이죠. 축도는 고린도후서 13:13에 기록돼 있습니다. 전 세계 목사님들이 예배 끝날 때 그 말씀대로 축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영원히 있을지어다!’ 하면 교인들이 ‘아멘’ 해야죠. 동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동의의 삶이 없으면 ‘너 따로, 나 따로’입니다. ‘내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잠 못 자고 애써서 번 돈을 너 같은 자식한테 왜 줘? 너한테 밥 살 이유가 뭐가 있냐?’ 그럽니다. 가난한 자를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내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인데,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잠 14:31, 17:5). 그 말씀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내가 너한테 꾸었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꾸어도 갚지 않으면 사기꾼 됩니다. 도둑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제하는 것, 가난한 자에게 밥을 사 주든가 남을 도와주는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행한 대로 복 받습니다(신 15:10).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잠언 19:17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자그마치 14군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여러분이 친구한테 빵 사 주고 피자 사 주는 것,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몇 배가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세요. 그것이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남을 대할 때, 물론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죠. 인간적으로 볼 때 좀 부족해도 ‘저분이 예수님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같이 대접할 때 복을 받습니다(골 3:23).

이제부터 절대 ‘아멘’ 하세요. 구역장 하라는데 못 한다고 합니다. 왜 못 하냐고 하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해 줘야 해서 못 한대요. 한심하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
오늘 고향 찾아가는 사람들 한심합니다. 아까 말씀했죠. ‘작은 형이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다. 병원에 한번 위문 가 봐라.’ 그러거나 ‘너 막역한 친구가 죽었어. 한 다섯 달 됐지.’ 그럽니다. 고향 찾아가 봐야 다 그래요.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하는 찬송가 있죠. 또 장례식에서 많이 부르는 찬송 중에 마지막 후렴에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는 가사 있죠. 그 나라에 병자가 어디 있습니까.
고향 찾아가면 친구가 있겠습니까? 아마 산도 다 깎아서 못 알아볼 거예요. 예전에는 엎드려서 개천의 맑은 물을 먹고 거기서 목욕도 했죠. 지금은 다 변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물질이 나와서 얼마나 몸에 해롭습니까. 지금 지구가 병들고 있습니다. 지구가 아파해요. 마음 놓고 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미국 왔을 때 신문을 보니 진짜 생수가 아닌 것을 판 놈들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의사가 먹지 말라고 방송을 몇 번 했습니다. 미국도 그래요. 성경 볼 때, 좋은 물 마시면 모든 질병이 달아납니다. 암까지 없어져요. 출애굽기 23:25에 물 먹으면 모든 질병이 달아난다고 했는데, 요즘 물 먹으면 질병이 달아납니까? 병이 더 걸립니다.
설날이라고 모처럼 소망 가운데 보따리 들고 새 옷을 입고 애들 데리고 갔더니 다 근심, 걱정, 슬픈 소식이에요. 그러니까 고향 못 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빌립보서 3:20 말씀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내 고향입니다.
빌립보서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히브리서 11:13-16 말씀 볼 때, 아브라함이 고향을 생각했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끝까지 하늘을 고향 삼았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 성을 예비해 두셨다고 했죠.
히브리서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옛날에는 기생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성이 있습니다. 1·4 후퇴 때의 일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여 잘 있거라’ 그런 노래는 6·25 사변 당시 시대상을 말하고 있잖아요. 제가 노래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노래는 가수가 불러야 됩니다. 금방울자매 통해서 고향 노래 들읍시다.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머나먼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천리타향 낯선 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집 잡히고, 논밭 잡히고, 부모한테 돈 얻어서 객지에 나갔다가 다 털어먹고, 노래 가사대로 말이죠. 부모 형제가 기다린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손에 쥔 것이 있어야 가죠. 술 한잔 마시고 마음을 달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고향 하늘 향해서 달려간다고 하지만 소망이 있습니까? 서글프죠. 우리는 이 땅에서 잘 못 산다고 해도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 삼고 있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고향 무정
1.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2.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랫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고향에 잡초만 무성하고, 내 집이 딴 집 되고, 고향이 아니죠. 태어나서 성장했다 뿐이지 고등학교, 대학교도 객지에서 나오고, 외국으로 가고 말이죠. 아버지,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집 다 팔아서 망쳤죠. 소망이 없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전서 1:3 이하를 볼 때,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망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산 소망이 우리 하늘나라의 기업입니다. 그걸 간직했다는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물론 사람으로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무덤이 있으니 가 보겠지만, 가 봐야 친척들이 ‘미국에서 왔다더니 선물 하나 없느냐?’ 그럽니다. 여러분보다 잘사는 친척들한테, 미국에서 오면서 빈손으로 왔다고 ‘미국 거지구나’ 그러한 소리 들으려고 가겠습니까? 혼자 가겠어요? 최소한 둘이 간다면 3천 불, 용돈 쓰면 5천 불 듭니다. 돌아오면 또 인컴 택스(income tax, 소득세) 내야죠. 집값 내고 자동차세 내고 말이죠. 그러니까 영원한 하늘나라, 변하지 않는 나라 소망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거기는 잡초도 없습니다. 이 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고향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날을 맞이해서 답답할까 봐 본문을 통해서 ‘날마다 생활에 진실, 즉 아멘의 삶을 살았느냐’ 이러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남의 옷을 꿰매든가 구둣방 하든가 심부름하든가 뭐 하든가 ‘아멘’의 삶이 있으면 이 땅에서 주인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진실되게,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 자체가 ‘아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멘’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 때 ‘아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모든 원천의 복(창 49:25)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상포진이 재발해서 말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데, 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저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시는 줄 알고 있지만, 또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올리겠습니다.
복되고 거룩한 주일, 음력으로는 오늘이 정월 초하루입니다. 마음이 착잡하고 또 고향을 그리는 성도님도 많이 있겠지만,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 하늘나라 소망을 기업으로 받은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마음 가운데 영원한 하늘 고향을 심어 주시옵소서.
자손만대에 주신 말씀으로 복 받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잘되고, 사업마다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교회도 잘되는 산 역사가 있을 줄로 믿사옵고, 모든 말씀 빌고 원하올 때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감사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006년 1월 29일 미국 올랜도 푸른동산교회 주일예배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 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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