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한 길에서 만나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한 길에서 만나다
6·25 전쟁 ‘호국의 현장’마다 지금은 교회가 세워졌다
휘선 박윤식 목사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그가 황해도 최고의 명문인 해주동중(지금의 중,고교 통합과정)을 졸업한 1946년은 소련 공산당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 전역을 점령한 시기였다. 청년 박윤식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레닌의 ‘국가와 혁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을 배웠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계급이 아닌 상인 집안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모스크바대나 김일성대에 갈 수도, 공산당에 입당할 수도 없었다. 모든 인민이 잘산다는 선동과 달리 당 간부만 잘사는 공산 체제의 허구성을 목격했고, ‘당과 수령을 위해서라면 부모를 죽여도 죄가 안 된다’는 반(反)인륜적 공산혁명 교육에 치를 떨게 됐다. 급기야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당원들이 사리원 북리 교회 송기남 집사를 끌고 가 톱으로 머리를 써는 모습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월남(越南)을 계획하던 1947년, 인민군 대좌로 있던 동창생이 보안대에서 체포령이 내려졌다며 도망가라고 귀띔해 주자 그는 5월 17일 새벽 2시 보안대 청사에 불을 지르고 월남해 전남 나주 영산포로 내려갔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낀 청년 박윤식은 1948년 6월 국방경비대1)에 입대해 군문(軍門)에 투신했다. 보병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통위부2)에서 본격적 군 생활을 시작했다3). 박윤식 목사는 “당시 박정희 소령(1948년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모시고 근무했다. 그는 남의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그는 대통령 취임 뒤 박윤식 목사를 따로 불러 만남을 갖기도 했다. 청년 박윤식은 먼저 입대한 장교, 하사관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의 실상과 공산주의의 잔혹성을 알렸다. 공산주의 이론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부대에서 교육하기도 했다. 소문이 나자 1948년 9월말 육군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그를 불러 공산주의에 대해 물을 정도였다. 그는 송호성 준장에게 공산주의 이론과 허구성을 자세히 설명했고, 한동안 얘기를 들은 그는 “지금은 공기가 좋지 못하니 당분간 말조심하라”고 말했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4). 송호성은 6·25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남하하지 않고 인민군 여단장이 됐고, 1950년 7월 4일 대남방송을 통해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수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고 선동했다.
1)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6년 1월 창설돼 실질적 군대 역할을 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육군’이 됐고, 이후 해군과 공군이 차례로 독립돼 나갔다.
2) 1945년 11월 설립된 국방사령부는 남한 내 군사(軍事)를 담당하는 미 군정청의 기구로, 이듬해 창설된 국방경비대를 관할했다. 1946년 3월 국방사령부를 ‘국방부’로 개칭했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이 강하게 반발하자 공식적으로는 ‘국내경비부’라는 명칭을 쓰고, 내부적으로는 대한제국 군사 기구인 통위영(統衛營)에서 이름을 따서 ‘통위부’라고 불렀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뒤 통위부(국내경비부)는 국방부로 공식 출범해 대한민국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3) 박윤식 목사의 입대 두 달 후인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통위부는 국방부로,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됐다.
4)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2011.11)8쪽
남로당 빨치산 토벌의 현장, 구례와 하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14연대 소속 남로당원 장교와 하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박윤식 목사는 반란 진압군으로 현지에 내려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인 여수,순천사건의 실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는 “남로당원들이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 가족의 7살 어린이의 팔을 잘라 대문에 걸어놓은 것을 여수에서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란군은 공무원, 군인, 경찰 , 우익인사와 가족 등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일대는 내전 상황이 됐고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패퇴한 남로당원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생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빨치산5) 게릴라전을 벌였다. 청년 박윤식은 지리산 중산리, 하동 쌍계사와 화개장터, 지리산,덕유산 등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자락인 전남 구례, 곡성, 광양, 영광과 전북 남원, 무주, 장수, 그리고 경남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 등에서 관공서와 민가를 수시로 습격했다.
박윤식 목사는 이후 성도들에게 남로당원들의 만행과, 거짓 사상에 미혹돼 파멸의 길로 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들과 후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2009년 동료 목회자, 성도들과 지리산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6·25 동란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생각할 때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빨치산도 한때 순수했던 젊은이들이었지만 공산주의의 거짓 사상에 속아 넘어가 끝내 젊음과 목숨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졌다면 그런 비극이 없었을 것입니다. 비극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힘을 다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 말씀대로 후손들에게 힘써 믿음을 전수해 역사의 비극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6)
박 목사는 목회 초기, 자신이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지리산으로 들어가 천왕봉 근처 기도처에서 3년 6개월 7일 동안 목숨을 걸고 기도와 성경읽기에 매진했다. 1970-80년대 그는 지리산과 장안산(전북 장수 소재)에서 성도들과 함께 여러 차례 구국기도회를 가졌고,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졌는지 성도들에게 강조했다. 박 목사는 2010년 9월 빨치산에 의한 국군 장병과 양민의 희생이 컸던 경남 하동에 섬진강변교회를 세웠고, 2015년 4월에는 역시 빨치산 피해지역인 전남 구례에 노고단교회가 세워졌다. 스무 살도 못 된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려다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곳에 구속사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세움으로써 비극의 현장이 참 생명을 얻는 소망의 현장으로 바뀐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2014년 12월 17일 천국 입성 직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과 구례를 오가며 성전 건축공사를 진두 지휘했다.
5)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비롯된 말로 공산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무장 게릴라를 뜻한다.
6) 참평안 2009년 10월호 기사
6·25 전쟁 발발 직전 옹진반도 전투
1949년은 최전방에서는 북한이 크고 작은 군사적 도발을 계속하고, 후방에서는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박윤식 목사는 육군 1사단 11연대가 참전한 개성 송악산 전투(1949년 5월)와 수도사단 18연대7)가 참전한 옹진반도 전투(1949년 10월)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서해5도를 눈앞에 둔 최전방 옹진반도는 상대의 인후를 찌를 수 있는 요충지로, 38선 이남이어서 당시에는 우리 측이 지배하던 지역이었다. 1949년 10월 북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옹진반도 은파산을 기습 점령했다. 전투는 포격전이 벌어질 정도의 대규모 충돌로 격화됐고, 국군 18연대와 17연대, 12연대 등으로 ‘옹진지구 전투사령부’가 구성됐다. 옹진지구 전투사령부는 248m 고지인 은파산을 놓고 인민군과 뺏고 뺏기는 고지전을 벌였다. 전투는 결국 1949년 12월 인민군이 은파산을 점령한 상태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제지로 종결됐다. 그러나 국군은 유사시 최전방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규모 반격을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역량을 보여줬고, 이후 북한은 6·25 남침 때까지 38선 부근에서의 도발을 전면 중단했다. 이로써 여유가 생긴 국군은 남로당 빨치산과의 전투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박윤식 목사가 소속된 18연대는 옹진전투사령부 해체에 따라 수도사단 예하로 복귀했다.
7) 18연대는 1948년 11월, 자원입대한 북한 출신 서북청년단원들을 중심으로 창설됐다. 공산당의 실상을 체험한 뒤 월남한 청년들이 주력을 이뤄, 투 철한 반공정신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전투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6·25 전쟁 중 3사단 예하에 편성됐고 18연대원들은 철모 좌우에 백골(白骨)마크를 그려넣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 땅을 되찾겠다.”고 다짐해 3사단은 이후 ‘백골부대’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도 18연대는 3사단 최정예 부대로 ‘진(眞)백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6·25 남침 발발과 오류동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김일성이 마침내 불법남침을 감행했다. 선전포고조차 없는 기습 공격에 개전 3일 만에 무려 4만 4천여 명의 꽃다운 국군 장병이 희생됐다. 18연대는 동두천 전투, 의정부 전투를 벌이며 적에 맞서다 북한산, 구파발, 행주나루터를 거쳐 한강 이남인 오류동 일대로 후퇴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6월 28일 새벽 박윤식 목사는 마포 백사장을 방어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개전 나흘 뒤인 1950년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6·25 전쟁 초기의 유명한 전투인 ‘오류동 전투8)’가 벌어진다. 김포 비행장(당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까지 점령한 인민군 6사단이 경인 가도까지 장악해 영등포, 인천 방면으로 진격하면 한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이 배후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위기였다. 국군은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근의 병력을 통합해 인민군을 저지하게 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경인가도에 이르는 지역에는 춘의산(105m), 범바위산(86m), 원미산(168m), 우장산(98m), 신월산(137m), 개웅산(126m), 매봉산(110m), 천왕산(144m), 지양산(125m), 와룡산(138m) 등의 낮은 산들이 이어져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6월 30일 인민군이 국군의 1차 방어선을 뚫고, 경인가도에 인접한 와룡산(현재 서울 구로구 궁동 소재) 일대까지 진출했다. 경인가도가 장악되면 인민군은 안양천을 건너 곧바로 영등포로 진격해 국군 수도사단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었다. 18연대가 소속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1일 총반격을 개시해 와룡산 일대는 물론 범바위산 일대까지 탈환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다음날까지 와룡산-지양산 일대의 고지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7월 3일 난지도 방면으로 한강을 건너온 인민군 4사단 일부 병력이 고척동 방면으로 진출해왔고, 마포 일대에 주둔하던 북한군 포대가 고척동과 오류동 일대로 대규모 포격을 가해왔다. 그날 새벽 노량진 일대의 방어선이 돌파되면서 국군의 한강 방어선도 붕괴됐다. 결국 7월 3일 오전 10시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받고 경기도 광명 일직동의 성채산 일대로 이동해 안양 방어선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병력과 장비의 압도적 열세 속에서도 오류동 전투를 통해 인민군의 경인가도 진출을 4일이나 저지하며 한강 방어선의 측방을 엄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윤식 목사는 42년이 지난 1992년 5월, 당시의 격전지인 서울 오류동 6만 평 부지에 성전을 헌당했다. 현재 평강제일교회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8) 오류동 전투에 대한 기록은 두산백과를 인용했다. 오류동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였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이다. 오류동 전투가 벌어진 개웅산, 천왕산, 매봉산이 오류동을 둘러싸고 있다.
1950년 9월 주문진 상륙작전
1950년 8월 박윤식 목사는 수도사단 18연대에서 3사단 22연대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이 3사단장으로 부임할 때 함께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박윤식 목사는 김석원 장군이 이끈 영해, 영덕 전투와 포항 전투 참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회고한 바 있다. 포항 전투는 1950년 8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국군 3사단과 학도병들이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한 채 거세게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다. 포항이 인민군에게 넘어가면 대구와 부산마저 위험해지고, 포항 인근 영일비행장(오천비행장, 현 포항공항)은 미 제5공군 폭격기들의 발진 기지여서 포항 방어는 매우 중요했다. 박윤식 목사는 “포항에 인민군 정예부대 병력은 얼마 안 됐지만 빨치산이 민간인으로 가장해 부두와 경찰서, 부대에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했다. 우리는 후퇴를 거듭해 오천비행장을 지나 구룡포까지 밤새도록 걸어갔다. 거기서 김석원 사단장이 절반으로 줄어든 병력을 다시 편성했다. 특공대를 편성해 오천비행장을 공격해서 빼앗은 뒤 영해,영덕 경계까지 진격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포항 전투는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안강, 기계 전투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명운을 지킨 전투로 평가된다. 박 목사는 “싸우다 보면 박격포가 날아와 전우의 창자가 흘러나오고, 수백 명이 전사하는 것을 목도했다. 밤에 자다 꿈을 꾸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전우가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전우들이 전사한 곳마다 소나무를 잘라 말뚝을 박아 표시해 놓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나무꾼들이 가져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국군과 학도병들이 목숨을 바쳐 인민군을 막아내는 사이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다. 전세는 일거에 대역전됐다. 3사단 22연대는 1950년 9월 30일 미군의 상륙함정(LST)을 타고 주문진에 상륙해 강릉과 양양을 탈환한다. 주문진은 인천, 군산과 함께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 후보지로 마지막까지 검토됐던 요충지였다.
박윤식 목사는 이로부터 62년이 지난 2012년 2월 주문진에 주문진해변교회를 건축했다. 그는 백두대간의 심장인 설악산 자락,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물들이는 동해안에 주문진해변교회를 세워 구속사(救贖史) 말씀이 태평양을 건너 세계 열방으로 편만(遍滿)하게 뻗어나가는 염원을 담았다.
1951년 5월 설악산 오색 등에서 벌어진 양양-간성 진격전
국군과 유엔군은 거침없이 북진했다. 3사단 22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원산을 탈환하고 중공과의 국경 지대인 혜산진9)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해 대공세를 시작했다. 3사단은 동해안 흥남까지 밀려 내려왔고 1950년 12월 15일부터는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이 실시됐다. 3사단은 강원도 홍천지구까지 후퇴해 동해안 방어전선에 투입됐다. 박윤식 목사는 이 시기를 전후해 3사단 22연대에서 3사단 18연대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 목사가 1950년 8월까지 소속돼 있었던 18연대는 수도사단 예하에서 3사단 예하로 이동한 상태였다.
1951년 1월 4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서울을 내주고 1.4 후퇴에 나섰다. 국군과 유엔군은 강원도 화천, 인제, 양양, 간성을 동부전선의 주 방어선으로 구축했다. 3사단은 강원 영서와 영동을 잇는 전술적 요로(要路)인 ‘인제-간성 도로’와 ‘원동-양양 도로’를 지키는 고지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3사단 18연대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횡성 전투(1951.2), 인제 한석산 전투(1951.4), 현리 전투(1951.5) 등에서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박윤식 목사는 인제 백담사에서 전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51년 5월 27일 ‘양양-간성 진격전’이 벌어진다. 동해안을 맡고 있던 백선엽 1군단장은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국군의 위상을 이 전투로 만회하기 위해 11사단을 설악산 일대에, 수도사단을 간성에, 3사단 18연대를 설악산 남쪽 가라피리(加羅皮里)에서 마산리 일대 공격에 투입했다10). 작전은 성공을 거둬 국군은 5월 29일 간성을 점령했다.
이로부터 34년 뒤인 1985년 5월 박윤식 목사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여호와이레 수양관’의 문을 열었다. 수양관이 위치한 곳이 바로 6·25 전쟁 당시의 ‘마산리’이다. 수양관 매입 2년 전인 1983년 3월 17일 박윤식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자신이 전투를 했던 곳이라고 소개하고 “우리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은 바로 여호와이레”라고 설교했다. ‘여호와이레’는 아브라함이 독자(獨子) 이삭을 바친 곳으로,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해당한다. 1986년 3월 10일에는 오색천을 가로질러 수양관으로 진입하는 ‘길갈교’ 착공예배가 드려졌다. 길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진(陣) 친 42곳 중 마지막 장소다. ‘할례를 행하고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곳’인 길갈을 지나면 영원한 천국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입성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9) 한반도 최북단 혜산진을 제일 먼저 점령한 것을 기념해 22연대는 지금까지도 ‘혜산진부대’로 불리고있다.
10) 「양양의 6·25 비화」(양양문화원, 2009년) 100~102쪽
1951년 6월 ‘철의 삼각지대’ 전투 후 총상
1951년 5월 27일-6월 20일에는 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에서 ‘파일 드라이버(Pile Driver) 작전’이 펼쳐졌다. ‘파일 드라이버 작전’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펼쳐진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의 하나다. ‘철의 삼각지대’는 강원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지역으로, 포천, 연천, 의정부를 통해 서울까지 직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인민군과 중공군이 동원 병력과 군수물자를 집결시켰다가 전선에 투입하는 핵심적 요충지였다. ‘파일 드라이버 작전’ 성공으로 국군 3사단과 9사단이 철원을, 미군 25사단이 김화를 점령했고, 이 전투 이후에는 북한이 한 번도 ‘철의 삼각지대’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다.
3사단이 6월 12일 철원을 점령한 뒤 박윤식 목사는 간성 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하다 6월 18일 기습해 온 적군에 포위당해 대퇴부에 총을 맞고 생사를 넘나들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1,800명 병력이 18명 밖에 남지 않았다. 심한 출혈로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겠다는 유혹이 밀려왔지만 “자살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주일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나 강렬한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피가 빠지니 눈이 보이지 않고, 온 몸이 저리고 추웠다. 총 맞은 자리에는 쉬파리가 붙고 구더기가 생기는 지경이었다. 칡뿌리로 출혈을 막고 고지에 들어가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3일 만에 근처로 진격해 온 미군 기갑사단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고, 부산 제5육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일본으로 후송돼 왼쪽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당시 중상을 입은 미군 장병은 일본에서 수술 받는 일이 많았고, 미군에 의해 구조된 박 목사는 미군 군의관의 호의로 일본에서의 수술이 가능했다. ‘한국군이었다면 다리를 절단했을 것이다. 절단하면 한 달이면 아물지만, 자르지 않고 치료하면 석 달, 6개월, 1년까지 간다’고 박 목사는 회고한 바 있다. 이후 마산 3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그는 1952년 상이군인으로 전역했지만 평생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살아갔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