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 60주년, 그 시절 구역장과 구역예배
말씀 사역 60주년,
그 시절 구역장과 구역예배
2024년 4월 교회달력, 큼지막한 사진 아래 ‘1979년 6월 원지동 성화산 수양관’이라고 써있다. 푸른 수목에 둘러싸인 그 수양관의 모습에 특별한 감회를 느끼실 만한 ‘옛 어른’ 박정애 권사의 이야기를 구역예배 중심으로 들어보았다.
넘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오뚜기처럼 일어서라.
일석교회(평강제일교회의 전신, 1971년~1977년 초)때부터 다녔어. 지금 82세니까 거의 반세기 전 일이네. 지금은 모두들 휴대폰이 있지만 70년대 초반에는 마을에 유선 전화기도 한두 대 밖에 없던곳도 많았어. 그때는 눈만 뜨면 성경공부나 집회가 많았기 때문에 구역식구들한테 참석 권유를 하려면 힘들었지. 집들도 띄엄띄엄 멀리 떨어져 살았어.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예배의 자리, 성경공부 자리에 데리고 왔었지. 버스값이 20원이었는데 버스 한 번 갈아타면 왕복 80원이었지. 길 자체가 차로보다는 오솔길 같은 걸어 다니는 길이 더 많아서 교회든 구역예배든 도보로 다닐 때가 더 많았어. 통신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만 그때가 더 일사분란하게 잘 모였던 거 같아.
당시에는 박윤식 목사님도 친히 구역예배에 오셔서 말씀을 주셨어. 못 오실 때는 구역장에게 성경 구절만 대주신 적도 있었구.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지. ‘아, 오늘은 이렇게 말씀만 보내셔 역사를 하시는구나.’ 말씀을 보내면 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셨잖아. 백부장도 예수님한테 ‘친히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말씀만 보내 주시니 믿고 가더니 하인의 병이 나았다, 그 말씀에 의지해서 가니까 역사가 일어나듯 그때는 그렇게 말씀만 보내 주시면 믿고 구역예배를 드렸어. 지금이야 구역공과책이 너무 잘 나와 있어서 체계적으로 교역자님들이 알려주신 대로 하지, 구역장이 따로 연구해서 전달하거나 그러진 않잖아. 당시에는 구역장이 말씀을 증거했어. 구역원 중에 혹 새가족이 있으면 그 수준까지 내려가서 초보공부시키고 그분 위주로 끌어 올려야 하니까 거의 반 목사라해도 될 정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했었어.
구역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구역예배에 안 왔다 그러면 따로 그 집에 찾아가서 꼭 예배를 따로 드렸어. 구역예배를 거부하거나 정 참석하기 어려운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무슨 일 때문에 못 오는지 파악하고 별도로 찾아가서 예배를 꼭 드려야지, 한 사람이라도 결석하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았어. 왜냐면 그렇게 방치해 두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그분 이름이 흐려지다가 지워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지.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해. 대충대충은 안 통했어. 자기 자식 키우듯 말이지. 어떤 때는 구역원이 내 마음 몰라주고 섭섭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 그렇지만 그 사람 수준을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먼저 깨달은 사람이 희생해야 그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겠어. 같이 따지고 똑같이 해버리면 그 사람이 실족해 버리잖아. 그러면 남아 있을 사람이 어딨어. 절대 하나님 일을 성취할 수 없게 되지. 그냥 아기 다루듯, 내 속이 뭉그러져도 어쩔 수 없어. 사람 하나전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특히 우리 교회는 빨리 성장하면서 시기, 질투에 견제도 많았잖아. 그런걸 뚫고 겨우겨우 교회에 앉혀 놨는데, 성전 건축봉사다 식당봉사다 오라가라 하는 것도 많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앞에 와서 믿겠다고 애쓰는데 언젠가는 깨닫는 날이 오겠지 하고 기도하면서 잘 이끌어 줘야지. 참 많이 울기도 하고 그랬어. 십중팔구 구역원이 오해든 뭐든 잘못을 했다 쳐도 흉보고 다닐 순 없지. 그 말이 돌고 돌아 당사자 귀에 들어가봐. 그러니 입 꾹 닫고 기도하면서 하나님한테 하소연해야지. 그게 유일한 해결 방법이야. 당연히 내가 틀렸으면, 내가 잘못했구나, 그러고 말지만 내가 아무리 옳았어도 억울해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생각하며 나를 누르고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가서 받쳐줄 때 그게 사랑으로 역사하시더라고. 진짜 아버지 심정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렇게 전도 하라고 강단에서 외치시는데 한 분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오기까지 얼마나 귀한 발걸음인데 그 한사람을 내가 떨어뜨리면 안되잖아.
구역장은 목자면서 엄마같은 존재
요즘에야 월례회든 심방이든 구역예배든 식당가서 대접하는 일이 많지만 그당시는 너나 나나 다들 빈곤하게 살던 때라 국수를 하든 밥을 하든 고구마를 쪄서 먹든 예배 마치면 집에서 다 해먹었어. 구역장은 목자면서 엄마 같은 존재였어. 자식처럼 양육하니까.
박윤식 목사님이 직접 구역예배에 오시는 때는 너무 좋으면서도 걱정부터 해. 어려운 시절이었잖아. 오신다고 하면 너무 좋은 데, 반면에 잡수실 거는 어떡하지, 뭘 잘해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은 없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거지. 그런데 오셔가지고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 ‘그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본문으로 말씀을 주시는 거야. 벌써 내 마음을 꿰뚫어서 다 보고 읽으신 거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만 집중해서 받을 수 있게 하신거야. 알다시피 박 목사님은 말씀만 주시는 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관한 유익한 것들도 많이 알려 주시곤 하셨어. 출산할 때 응급조치 같은 것도 정말 세세하게 알려주셨어. 아무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내가 수혜를 입었잖아. 당시 아들 둘을 낳고 남편이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지방 어딘가 내려가 있었고 나는 셋째를 임신중이었어. 만삭 즈음 어머니가 올라오셨는데 집에 쌀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고 아직은 애가 나올 때가 안 된 것 같다고 하시면서 ‘네가 연락하면 또 오겠다’고 하시곤 다시 시골로 내려가 버리신 거야. 세상에나, 그런데 얼마 있다 애가 나왔어. 산파를 부를 돈도 없었고, 집안에 먹을 거라곤 없지, 나는 국수를 싫어했지만 그거라도 먹고 힘을 주기 시작했지. 혼자서. 두 아들이 옆에 있었지만 콩알 만한 것들이 뭘 알아. 그때 생각난 게 구역예배때 박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었어. 노란 쌀포대 있잖아. 흙 먼지 안 묻은 깨끗한 걸로 몇 장 뽑아서 장롱 밑에 미리 준비해 놓은 게 있었어. 가위하고 실도 옆에 챙겨 놓고. “탯줄은 배꼽 밑으로 한 뼘 잰 다음에 자르고 묶어라. 자른 다음 그 탯줄을 잡고 있어야지 놓아두었다가 올라붙으면 죽으니까 그걸 발뒷꿈치로 살짝 딛고 있어라. 그 다음 배를 살짝 훑으면서 그걸 살짝 빼면 퐁 빠진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세세하게, 그것도 여러 차례 알려 주셨었거든. 그걸 기억했다가 그대로 한 거지. 어머니는 시골로 내려가 버리셨지 정말 앞이 캄캄했어. ‘아버지 빨리 낳게 해 주세요. 순산하게 해 주세요’ 매달렸어. 진통이 오면 이불 위에 엎어져 울며 혼자 막 뒹굴다가 기도했어.
한 시간 반 정도 그렇게 혼자 애쓰다가 애기 울음소리가 나니까 옆집 아주머니가 듣고 놀래서 쫒아 오셔서 아기 목욕을 시켜 주시고 그랬지. 목사님은 영육간 아버지, 아니 친정 부모님도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들까지 알려 주셨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텐데.
석교회 시절은 200~300명쯤 될까, 얼마 없었잖아. 그 시절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동고동락하며 함께 신앙생활 했던 동역자들은 아버지 품으로 가고 지금은 몇 명 안 남았어. 여운초 목사님, 전극화 장로님 연로하신 거 보면 알잖아. 당시에는 만족을 몰랐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느냐 누가 물으면 나는 가고 싶다고 할거야. 월셋방 살면서 콩나물 살 돈은 없어도 10원짜리 모아뒀다가 교회 갈 차비는 꼭 준비했었어. 응암동에서 일석교회까지 가려면 노량진인가 어디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한푼이 귀했던 그때, 아깝다는 생각은 왜 하나도 안들었나 모르겠어. 교통비도 헌금이라고 하셨잖아. 돌아보니 은혜로 여기까지 왔어. 다 감사야. 하늘 아래 이 지구촌에서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큰 복을 받았나, 춤을 추던 때였어.
우리 큰아들이 변호사야. 그렇지만 검사고 변호사고 그런 거 어디 가서 내세운 적이 없어. 그건 이생의 자랑이잖아. 검사 될 때도 사람들이 그랬어. 얼마나 좋으냐고. 엄마가 기도를 많이 해서 훌륭하게 된 거라고. 별 소리를 다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검사 되라고 단 한 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어. 검사 공부하는 기간 중에도 교회를 잘 못오니까 ‘아버지, 어서 빨리 어떤 모양으로도 상관없으니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달라고’ 그렇게만 기도했어. 애들 키울 때도 시험 기간에 교회 수련회가 있다 그러면 너는 공부나 해라 그런 적 없었어. 공부보다 교회 수련회가 우선순위였지. 공부를 못하는 자식도 있었지만 걱정 안 했어. 아버지도 그러셨잖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으니 기술 쪽이든 뭐든 쓰임받을 데가 있을 거라 하셨거든. 그 말씀을 믿었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게 쉽진 않아. 분명 콩인데 아버지가 이게 팥이다 라고 하셨다고 ‘아버지, 이건 콩이에요’ 라고 반문하면 통과가 안돼. 창조의 능력이 있으신 아버지 말씀은 무조건 순종이야. 믿음과 순종은 하나더라고. 아버지 은혜 가운데 영광만 안가리고 살면 돼. 나도, 자식들도.
하루하루 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
박 목사님이 그러셨거든. 하루하루 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이라고. 내 나이, 아버지한테 갈 날이 가까이 오고 있고 지금 상황들을 보니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뭐라고 해야 하나.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늙어지고, 뜻은 이루어져야 되는데 맹목적으로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되잖아. 세상 되어지는 모든 것을 봐도 말세가 딱 우리 눈 앞에 와 있는 걸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이 마당에 세상에서 출세했다 잘 나간다 뭐 그런 거 자랑할 것도 없고 신경 쓸 것도 없고. 어떻게 하면 신앙 전수를 잘할까 이거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봐 나는. 이 땅에 산다해도 얼마나 살겠어. 말씀이 우리 당대에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면 그걸 믿고 붙잡고 끌어당겨야 되거든. 믿는 자가 있어야 아버지가 뜻을 이루실 거 아니야. 1세대가 우리인데, 말씀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맨날 자손만대 어쩌고 떠들면서 시험 들고, 네가 옳으니 내가 맞느니 할 때가 아니야. 마귀가 박수치면서 얼마나 좋아하겠느냐고. 역대 선지자들이 눈물 흘리며 기가 막혀 하시겠지. 마지막 때에 마지막 주자가 잘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겠느냐 말이지. 우리가 정말 참고 아버지 뜻을 위해 몸부림쳐야 되는데 연약한 사람이라 또 까먹고 딴 짓 하잖아. 그러면 다시 정신 차려서 일어나야지. 아, 이 말씀도 여러 번 하셨어. ‘사람인지라 안 넘어질 순 없다. 그러나 빨리 일어나라. 오뚜기 신앙!’ 맨날 말씀하셔서 아직도 귀에 쟁쟁해. 넘어져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은 것이지만 오뚜기같이 바로 팔딱 일어서면 그거는 된 거라고 그러셨어. 마귀는 지금 어떻해서든 하나라도 자기 편 만들라고 잠도 안자고 일하고 있는데, 우리 끝까지 잘 이겨내자고.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박정애 권사에게 추가 인터뷰 차 전화를 걸었더니 “지금 교회 지킴이하는 중”이라고 했다. 82세 노구로 새벽 6시에 와서 주일 2부, 3부 예배 마치고,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밤 10시-새벽 3시 지킴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취재, 정리_권오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