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 하나님의 보호는 – 사도행전 2:38-47, 베드로전서 4:2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보호는
사도행전 2:38-47, 베드로전서 4:2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 천상천하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는 고등 동물인 우리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6-19절 말씀을 볼 때,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자손을 낳을 수 있게 되었고, 땅은 범죄한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어 아담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진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우리 인간들은 위로받아야 마땅하지만 이 땅에서는 위로받지 못하고, 받아봤자 임시변통입니다.
성경 말씀을 볼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참 위로자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위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다.’라고 했고,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살아 계신 분으로, 한 번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보내 주시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위로가 되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위로가 됩니다(고후 1:3-4).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영원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우리 죄가 꼼짝 못 하도록 완전히 못을 박혔습니다. 바로 나와 여러분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머리로 죄지은 것, 손과 발과 몸으로 죄지은 것, 생각과 마음으로 죄지은 것, 모두 주님이 대신해서 고난받으셨습니다. 죄에서 완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목사나, 장로나, 전도사나, 권사, 집사나 머리가 희어지고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60~70년을 믿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을 미워하고 악한 생각을 하고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또 못 박혀 죽어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이나 로마서 6장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단 1회, 즉 “단번에” 죄를 그쳤습니다(롬 6:10, 히 9:26-28). 우리 때문에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는 것 자체가 벌써 십자가이고, 고난이며, 고통이고, 환난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죄를 그쳤다고 했습니다(벧전 4:1). 믿는 우리가 지금까지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놓는 사람은 집안의 모든 일이 잘 안 됩니다. 공의로우시고 거짓이 없으신 성부, 성자, 성령님을 속이고 그분을 거짓으로 만들어 놓고, 믿는다고 자만하며 으스대며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뜨겁습니까? 뜨겁게 구하고, 찬송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뜨겁습니까? 찬송가 하나하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의미 있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뜻을 생각하면서 뜨겁게 구하고, 찬송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13-14절 말씀을 볼 때,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 반드시 응답을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과 마가복음 11장 24절에도 “마음에 확증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께 상달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천사가 기도 향료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내가 한 기도를 펼쳐 놓기 때문입니다(계 5:8, 8:3-4).
믿고 기도하셨습니까? 기도조차도 안 하니 무엇 하나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전도했습니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전도고,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0절 말씀을 볼 때 100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없어지면 99마리를 들에 놓고서라도 그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안타까운 심정, 또한 그 한 마리를 찾았을 때 목자의 기쁨이 너무나 큰 것같이 회개할 것 없는 99마리보다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돈을 찾으면 잔치를 열듯이 전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입니다. 내 재산, 내 아들딸, 사위 며느리, 친척과 부모가 돌아옵니다. 죄인 하나가 돌아오는 것, 그리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무관심하게 두지 않으시고, 잃어버렸던 재물도 다 찾게 해 주고, 망종에 지나지 않았던 내 아들, 딸도 다 돌아오게 하십니다.
맡은 바 직분에 힘썼습니까? 찬송과 기도에 힘썼습니까? 말씀 듣기에 힘을 썼습니까?
일찍이 느헤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너의 힘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느 8:10). 비도 소나기가 잠깐 와야 소용없고, 복된 장맛비가 쏟아져야 물이 흘러가서 모입니다. 그래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이 철철 흘러넘치고, 기도가 흘러가야 합니다. 또한 말씀 선포가 차고 넘쳐서 흘러가야 합니다. 말씀은 폭포수같이 쏟아져서 차고 넘쳐 흐르고 있는데 여러분 마음의 방이 너무 작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이는 교회, 충만한 교회, 은혜가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받아서 죄를 그치게 하셨는데, “너희들은 그것으로 마음에 갑옷을 삼으라.”라고 했습니다(벧전 4:1). 이 말씀의 뜻은 제발 죄가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마음에 갑옷, 즉 방탄조끼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또 죽어야 하겠느냐? 한 번 고통 받고, 한 번 고난 받고,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말씀하시는 심정을 잘 깨달아야겠습니다. ‘마음’은 원어로 볼 때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볼 때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심장 폐부를 살펴 모든 생각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신앙의 자유’를 생각할 때 고난은 받을 만합니다.
주의 권능이 우리를 자유케 해 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고난은 받을 만합니다. ‘고난받지 않으면 내가 세상에 빠져 허튼 짓을 할 것이고, 세상 오락과 기쁨 속에서 또 내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 없도록, 고통으로 인해 세상에 눈 돌릴 겨를도 없게 하시려고, 참신앙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조금만 가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 집의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 생활도 등한시합니다. 찬송이, 기도가 나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듣기를 원합니까? 교회 나갈 때 ‘왜 또 모이지?’ 하며 늘 망설이고, 옆에서 같이 말씀 받으러 가자는 권유에 마지못해 앉아 있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에게 인내심을 주기 위해서 고통이 옵니다. ‘그렇지, 마음에 갑옷을 삼아야 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 같은 것 고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감사할 때 도리어 고통이 변해서 기쁨이 됩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내가 너 오기를 기다렸어. 내 잘못 때문에 내 집과 내가 이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구나. 너 잘 왔다!’라고 할 때 도리어 고통, 고난, 환난이 미안해서 우리한테 어찌할 바를 몰라 견디다 못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 하나님 앞에 예배가 우선입니다. 우리는 예배로 언약하는데, 그 예배에는 피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4장 8절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피로 언약을 맺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을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방패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것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찬송가 펼쳐 놓고 하나하나 가사를 음미해 가면서 힘차게 찬송을 불러 보세요. 찬송은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으로, 찬송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귀가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롬 8:17, 빌 1:29, 살후 1:4-9).
세상과 싸워 승리할 힘은 예배를 통해서 나옵니다.
세상과 싸워 승리할 힘은 예수를 믿는 믿음, 즉 예배를 통해서 나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서원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밖에 없습니다. 갑옷은 약하지 않고 매우 견고해서 적한테 해를 받지 않게 해 줍니다. 총알이 와도 튕겨 나갑니다. 이처럼 죄를 대적하는 정신이 있어야 영혼의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늘 반짝반짝하며 등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잠 20:27). 하나님이 필요할 때 언제나 들어 쓰신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다면 찬송을 안 할 수 없고, 기도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사도 바울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입니다. 우주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둘째, 베드로의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승리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는 큰 고통 중에 있었는데 ‘더욱 고난을 받아라. 그래야만 예수의 남은 때가 여러분 통해서 이루어진다.’(골 1:24, 벧전 4:1-2)라는 참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생 복락을 상속받으며, 행한 대로 이자까지 상속받는다고 하셨습니다(롬 8:17, 딤후 2:11-12, 약 1:12, 벧전 5: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생아같이 내버려 두지 않고 친부모로서 잘못하면 때리고 야단치고 각성시키시는구나! 얼마나 고마운 내 부모님인가?’(히 12:5-11)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생아처럼 만들고 싶지 않으셔서 고통 가운데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벧전 1:7). 금도 연단받으면 풀무불에 다 날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금보다 더 강하게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신 4:20, 욥 23:10, 사 48:10, 겔 22:18, 20).
고난의 약속은 승리의 보장입니다. 승리로 보장해 주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말씀하십니다(사 63:9). ‘너 고통당할 때 내가 바깥에서 뒷짐 지고 보지 않았다. 너 고난받았을 때 나도 너와 함께 고난받았다.’ 자식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낳은 부모, 특히 어머니는 그 자식보다 더 어려움을 당합니다. 마음고생은 말도 못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바꿀 수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낳은 부모는 자식을 잊어버리거나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를 잊어버리지 않겠다.’(시 27:10) 하시며 여러분의 고통과 환난 가운데 오셔서 동참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시련으로 영광과 존귀를 얻습니다(벧전 1:5-7).
두 번째,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큰 복이 있습니다(벧전 3:14-17).
세 번째, 고난으로 인내하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을 얻습니다(벧전 2:19-21).
네 번째, 주님의 뜻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고난의 갑옷을 삼는 자는 죄를 그칩니다(벧전 4:1).
다섯 번째, 고난에 참여함으로 즐거워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벧전 4:12-16).
바로 그러한 분이 ‘천국 갈 자의 모습들’입니다.
전도하는 해산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3-14절을 볼 때, 우리는 주의 뜻을 위해서 전도하는 해산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해산은 하나님이 시키십니다(사 66:9, 딤전 2:15). 전도는 예수의 명령입니다(마 4:19, 10:5, 8, 행 1:8).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되고, 불과 물 가운데서 보호받습니다(시 121편, 사 43:1-2, 벧전 1:5, 7).
모세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넷째 재앙은 ‘파리 재앙’인데, 이것은 ‘귀찮은 일’을 의미합니다(출 8:20-25).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는 것이 파리인데, 파리는 아주 귀찮은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에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말 안 들어도 귀찮고, 남편이 허튼짓을 하게 돼도 귀찮습니다. 세상에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아서 심령이 하루도 쉴 수가 없고,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파리는 병균을 옮깁니다. 파리 같은 교인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가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 저 말 하고, 그저 아무 데나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앉으면 입이 가만히 있지를 않고, 윙윙거리며 그 말을 듣고 나면 병이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듣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에는 둔하여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귀찮은 세상의 모든 일들도 언젠가는 말끔히 사라지는 날이 있다고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아홉 번째 재앙은 ‘암흑 재앙, 캄캄한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암담한 일이며, 앞길이 막혀 갈 길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출 10:20-23).
믿는 자와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므로 하나님이 보호하는 땅에는 광명이 비쳤지만, 믿지 않는 애굽 천지에는 사흘 동안 캄캄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생활에 암담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길이 있다면 죽는 길밖에 없다고 느껴지고, 막연하고 막막한 것, 이게 바로 암흑입니다. 옛날 모세 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캄캄하고 답답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당신의 아들, 딸인데 왜 애굽 천지에 와서 앉아 있습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캄캄함을 당하고 나를 보려 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암담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에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며 신앙의 지혜와 용기를 얻어서 암흑에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암흑과 같은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주일날만 나오는 ‘한 번 신자’ 있습니까? 수요 예배에 가긴 가야 될 텐데 마음만 분주합니다. 특별집회, 목요 구국 예배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일날만 나오면 1년 365일 중에 52번 나오게 됩니다. 313일은 다 까먹게 되고, 그러한 신자가 신앙으로 성장하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가 비면 그곳에 마귀가 앉아서 사단이 장난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가야 할지 망설여질 때는 ‘내 자리에 앉지 못하면 마귀가 대신 앉아서 나와 우리 집안을 어지럽게 하겠구나.’ 생각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절대로 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자기가 앉아야 하는 자리가 있고,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앉으면 찬송을 부르게 되고,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어 주신다고 시편 5편 7절, 22편 3절 등에서 말씀하셨습니다(시 9:11, 65:1, 84:4, 98:1).
찬송가의 가사 구구절절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7절에는 뜨겁게 찬송했던 초대교회가 부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 구구절절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찬송할 때는 입으로는 찬송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아멘,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에게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47편 1절에 손바닥을 치고 춤을 추고 발을 구르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나빠도, 속상해도, 역경 중에서도 찬송해야 합니다. 그 찬송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모든 문제가 해결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몸에 질병 있는 분들은 꼭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러기 때문에 항상 어둠 속에 갇혀 절망하며 속상한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찬송하는 순간 벌떡 일어서며, 질병이 달아나고, 집안의 모든 어두움이 달아나서, 자신의 강건함을 찾아 힘차게 일하며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주변의 간증을 통해 목격해 왔습니다. 그런 고백을 들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왜 못합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욥의 열 자녀가 아침에 밥을 먹다가 돌풍이 부는 바람에 집 기둥이 무너지면서 무거운 기와집이 다 내려앉아서 하루아침에 모두 다 죽었습니다. 이를 남의 얘기 듣듯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들딸 다섯, 여섯 명 있는 가운데 하나만 죽어도 정신이 멍해지고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될 텐데.’ 하며 통곡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말도 안 나옵니다. 욥은 열 자녀가 식사하다가 다 죽고, 게다가 연하여 강도가 들어와서 약대 3,000마리 가져가고 종들도 다 죽었습니다. 또 연하여 강도가 들어와서 양을 다 가져가고 풍비박산을 만들었습니다. 또 연하여 일이 일어나고, 가진 것 모두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 생명만 살려두고 온몸에 악창, 독창, 피부병에 걸렸으며, 손으로는 시원찮아 돌기와 조각으로 살을 긁었습니다. 피부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문드러지고 피가 나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욥의 아내가 보다 못해 ‘이래도 하나님 믿으며 이래도 신앙의 정조를 지키겠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어리석은 여자 가운데 하나로구나!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가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을 뿐이라.’라고 말했습니다(욥 2:7-10). 이것이 욥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존경받던 욥이 많은 사람에게 비웃음당하고, 비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단이 흔들어 봐도 요지부동입니다. 끝내 욥기 42장 말씀을 볼 때 재산을 배로 받았고, 자식들도 다시 주셨으며, 그 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는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했습니다(약 5:11).
찬송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예배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 경배하지도 않으며, 하나님 만나는 시간에 쓸데없는 세상 생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은 우거하는 자, 붙어 사는 자, 즉 나그네입니다. 아침에 안개 같아서 해 뜨면 사라지며, 아궁이에 피어나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없어져 버립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의 말씀으로 마음에 갑옷을 삼고, 믿음의 쌍지팡이를 들고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초로(草露) 같은 인생을 향해서 영생의 말씀을 주실 때 꼭 받으시고,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피차의 사랑과 권면을 통해서 위로하고 도와주면서, 주의 몸 된 교회에서 힘차게 천성을 향하여 전진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9년 7월 1일 목요 구국 예배
휘선 박아브라함 원로목사 설교
- 2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