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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와서 조반을 먹으라’ – 요한복음 21:1-14

2026.03.27 10:24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한복음 21:1-14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한 불신 때문에 전 인류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거짓이며, 정직과 성실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의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과 뒤바뀌어 혼돈하고 타락한 상태로 약 6천 년 동안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으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침내 거짓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제자들한테 3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와서 조반을 같이 먹자’는 것입니다(요 21:12).

 

예수님은 3년 동안 하늘의 비밀을 가르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만 인간의 속죄 제물, 대속물로서 이 땅에 오셔서 그 한 몸을 버리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요 8:51). 그러나 그 말씀을 전부 다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옥에 갇혀도 주님과 같이 가겠습니다(눅 22:33)” 맹세할 때 나머지 열한 제자도 덩달아서 같이 맹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욕하고 맹세하며 저주했습니다(마 26:69-75, 막 14:66-72, 눅 22:54-62, 요 18:15-18, 25-27).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고기를 잡고 떡과 숯불을 다 준비해서 “와서 조반을 같이 먹자!”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저는 성경을 보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세상 생각 같으면 속도 참 편한 분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앞길을 망치고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과 같이 밥을 먹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너 정신이 있냐? 그렇게 실컷 당하고도 속이 편하다고 밥을 같이 먹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는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려고 했으나, 그 끈도 그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 끈이 끊어져 낭떠러지에서 떨어짐으로 창자가 터져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행 1:18). 나머지 열한 제자도 전부 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3년 동안 그분들이 돈을 벌었습니까? 예수님이 먹이고, 입혀 주셨고, 인류 시조 타락에서부터 장차 천국 영광의 세계까지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어서 그 비밀을 다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당시 이스라엘은 50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2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말씀 볼 때 하나님께서 그 부족한 제자들에게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권세와 능력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짓밟고 내동댕이칠 수 있습니까?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점점 밝아오고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생명의 주께서 부활의 영광을 가지고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었지만 후에 뉘우치고, 주를 맞이할 수 있는 믿음으로 주께서 가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갈릴리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한 선동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처참하고 허무하게 죽었는데 우리가 뭘 믿겠는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 할 때 나머지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요 21:3). 일곱 제자가 3년 동안 같이 생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예수님을 보았고, 빈 무덤이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가서 수건만 개어져 있고 아무도 없던 빈 무덤을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면(마 26:32), 열한 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 말씀이 사실인지 한 번 가 보자!’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후 7번째입니다. 전체적으로는 7번, 제자들한테만 3번 나타나셨는데,
첫 번째, 막달라 마리아에게(요 20:12-18, 막 16:9) 두 번째, 또 다른 여자들에게(마 28:9)
세 번째, 시몬 베드로에게(요 21:1-24, 고전 15:5) 네 번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눅 24:31-32). “틀렸다, 이제 집에 가서 뭐라고 말하지? 선생님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어떻게 하냐?” 어깨가 축 늘어져 실의와 낙심에 빠져 가는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당신 얼굴이 왜 그렇소?” 물으셨고, “그분이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며 성경 말씀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엠마오 두 제자가 “해가 저물었으니 식사라도 같이 하고 가시죠?” 권유했고, 함께 식사하시며 저희에게 떡을 떼어 줄 때, 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예수님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제야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씀을 풀어줄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냐?” 하며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일곱 제자가 말씀을 믿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았을 텐데 눈이 어둡고, 마음이 캄캄하고, 믿음이 하나도 없어서 예수를 봐도 선생님인 줄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잖아요? 3년 동안 훈련받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비밀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인류의 대표가 주님의 제자들 아닙니까? 제자들의 배신에 예수님은 마음 아파하셨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서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다섯 번째, 도마 빠진 제자들(요 20:19-23) 여섯 번째, 도마 포함한 제자들(요 20:26-29)
도마는 8일 지각생입니다. 의심이 많아요. “나는 가시관, 손에 못 박힌 자리, 옆구리 찌른 자리와 발을 내가 직접 만져 보고 믿겠다”라고 말했고, 그런 도마에게 주님이 나타나서 “도마야, 너 만져 봐야 믿겠다면서? 만져 봐” 보여 주시니 그때 완전히 고꾸라져서 믿은 거 아닙니까?

일곱 번째, 고기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요 21:1-14) 우리는 얼마나 복입니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8일 만에 깨달은 자도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 말씀인 줄 알고 그대로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 믿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조반에 초대받는 오늘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길이며,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약속하신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한 생명(요일 2:25)”입니다. 오늘 우리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처럼 땅에서 맺으면 하늘에서 맺습니다. 주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져왔지만, 사람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요 1:1, 14). 요한복음 3장 12절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대로, 가져왔던 말씀을 내놓지 못하고 그냥 가져갔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는 아버지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종말에 관한 그것과 장차 될 것을 다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14:26, 15:26, 16:13, 25). 오늘, 이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조반에 초대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조반에 초대받지 못한다면 오늘 예배가 모두 헛것입니다.

믿음 없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선동하는 것을 다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보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던하게 숯불과 떡과 생선을 준비하시고, 밤새 추위에 떨었을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았습니까? 가야바 뜰에서 멀찍이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가 불을 쬐다가 그가 예수의 제자임이 들통날 뻔하자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세 번 부인했던 그 상황을 베드로에게 기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높은 학벌, 멋진 경력,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등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계산법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 출발하고 진행하며 마쳐야 합니다. 그 마침의 보고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한이 없고 능력이 끝이 없는 분이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6).

 

아침 식사로의 초대는 무너진 신앙 회복의 기회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없이 살 때 순간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 남편을 전쟁터로 몰아 죽이고 그 부인을 빼앗았습니다. 그 후 첫 아이를 낳았으나,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여겨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다윗 왕이 깨닫고 회개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죄지었습니다” 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담요가 다 썩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회개를 통해서 우리아의 아내와 지은 죄를 용서받은 후, 죄짓기 전에 한 일보다, 회개한 후에 한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저주했던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이런 회개가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큰 소리로 예수님을 저주했던 순간, 가야바 뜰에서 포승줄에 묶여 있던 예수님의 눈과 딱 마주치자마자 너무 놀라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밖에 나가서 심한 통곡을 하고 회개한 것 아닙니까?(눅 22:60-62)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얘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얘들아, 고기 잡았느냐?”라는 물음에 “못 잡았습니다”라고 답하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습니다(요 21:5-6). 제자들은 평생 바다에서 먹고 산 사람들이라서 매우 능숙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으나 밤새 아무리 수고해도 한 마리도 못 잡았으므로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참고-눅 5:4-6). 제자들이 기뻐 좋아할 때, “내가 숯불 다 피워놨다. 함께 먹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당신이 누구신지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의 눈이 떠지고 ‘이분이 부활하신 예수구나’ 깨달았던 것입니다. 조반을 함께 먹자고 하며 너희가 잡은 것도 같이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요 21:9-10). 친히 준비하신 신령한 생선과 떡, 거기에 육신적으로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신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께서 떡과 생선을 집어서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거룩한 아침 식사로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숯불 위에는 예수님이 준비한 생선과 제자들이 잡은 생선, 두 종류의 생선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실망과 낙심이 아니라 기쁨 주기를 원하셨고, 이제는 모든 생활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믿으며 영원한 세계만 소망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회복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신하고 도망갔으나 이제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며 전과 같이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지속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와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했던 순간, ‘나 그거 기억도 안 해’ 눈으로 말씀하며 물으셨습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찬 공기를 따뜻하게 해 주는 불을 왜 피웠는지 알아? 너는 불 앞에서 나를 저주했으나 나는 불에서 너를 축복하고 너의 신앙이 회복하기를 바란다.’라는 메시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마음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집에서 쬐던 숯불은 헬라어로 ‘안드라키난’입니다. 그곳에서는 예수를 저주하고,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했습니다(막 14:71). 이제 예수님이 피워 놓은 숯불 앞에서는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 피워 놓으신 그 자리에 초대받아서 주와 함께 아침 식사 같이하는 거룩한 부활의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놀라운 아침 식사는 가출했던 마음을 귀가시키는 사랑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끈질기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이며, 인내심을 통해 깨닫게 해 주는 예수님의 실물 교육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만, 베드로같이 교회 생활 내동댕이치고, 내 마음대로 자기가 하나님 되어 산 게 한두 번입니까? 죄 지으면 양심에 가책이 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 될 텐데 하면서도 육신이 약하여 또 어둠에 점령당하여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 죄짓게 해놓고 결국 폭로하게 만듭니다. “너 내 말 듣지 않으면, 네 죄 동네방네 다 공포할 거야” 그렇게 마음을 조정합니다(참고-민 32:23). 죄짓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망신시키고 마지막에는 불에 다 태워 죽인다고 했습니다(계 17:16). 그런 말씀 읽어볼 때 가슴이 서늘해지죠. 죄지을 때는 좋고 달콤하나 결국엔 죄의 값으로 심판받게 됩니다. 죄는 망하게 하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욥 4:7, 롬 6:23).

예수를 떠나 가출한 불량배 같은 제자들을 위해 주님이 친히 음식을 준비하시고, 먹이고 대접하면서 다시 회개시키는 예수님의 한없이 넓은 사랑을 보세요. 예수가 빠져 있으니 고기가 잡히겠습니까? 못 잡아요. 예수 없는 출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 얼마나 삽니까?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죽는 준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천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바로 천국 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예수를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쫓아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며,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없이 어떻게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와 같이 진행하고, 예수와 같이 마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끝이 있지만 영원부터 영원까지인 예수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는 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지만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감사가 차고 넘치는 단체나 개인이나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만족이 없고 불평만 가득합니다. 불평, 불만을 품지 말고, 분을 품어도 저녁까지 품지 말라고 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으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 죄를 사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말씀 볼 때, 두렵고 떨리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의 아침 식사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중심을 돌이켜보게 한 은혜의 시간이었으나 제자들은 은혜의 시간인 것을 모르고 공포와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옛사람,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 ‘고기나 잡으며 살아가야겠다’ 생각했으니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한 순간입니까? 주님은 계시는데 겁나니까 부를 수도 없고, 예수님은 그물도 그 어떤 도구도 없는데 숯불이 있고, 떡과 생선도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에 코 골고 잘 때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린 것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기적의 생선과 기적의 떡을 먹으면서도 감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물어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물도 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 생선과 떡은 어디서 났습니까?”라고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생활이 이렇게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믿지 못했고, 성경을 믿지 못했습니다. 일곱 제자는 예수 없이 산다고 예수에 대해서 독립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독립 선언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예수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죄는 예수에 대해서 독립 선언한 것입니다.

조반을 마친 후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부인한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눈물이 나는 순간이죠.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한 놈입니다. 또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님 사랑합니다” 답했습니다. 그 고백을 받고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시몬아 네가 나를 진짜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역시 “내 양을 먹이라” 했습니다. 세 번이나 물어보실 때, 베드로는 근심이 되어 “선생님! 선생님이 다 아실 거 아닙니까?”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낯짝을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까지는 마음이 안 놓였으나 세 번째는 “나 이제 떠나도 예수의 마음 가지고 사명으로 살 수 있겠구나” 싶어 예수님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양을 치라” 말씀하셨고, ‘내가 너한테 다 맡기고 가겠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거룩한 조반에 초대받은 결론이 “내 양을 치라”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배신한 베드로에게 다시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의 은총을 깨닫고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때 다 보여 주신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 흔적, 다 찢어져서 험상궂게 된 못 박힌 손과 옆구리, 발을 보여 주시며 억조창생 인류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찬송가 185장(새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절)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아! 네가 부모보다 친척보다 아이보다 재물보다 기업보다 그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에게도 연거푸 세 번 물어보신 이유는 가야바 뜰에서 불 쬐면서, 세 번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한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똑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벌써 몇 년입니까? 가야바 뜰에서 쪼그만 계집아이가 베드로를 가리켜 “이 사람은 나라의 유혹자 이단, 그 예수를 따라다녔어요” 폭로하니 베드로는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예수 모른다” 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물을 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가슴을 치며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마 26:69-75, 눅 22:55).
세 번째 저주할 때 예수께서 재판받다가 뒤를 돌아보셨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눅 22:61). 죄인이 주를 사랑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모를 거역한 탕자 같은 자식이 그 부모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남편 배반한 악처가 본 남편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불효한 자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눅 15장). 주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그저 겁이 나서 눈물만 차오르며 ‘주님이 다 아실 거 아닙니까? 사랑합니다’ 되뇌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고 뉘우치는 베드로 마음을 읽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양을 치라. 나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가는데 네가 남은 사명을 감당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주님 말씀은, 실로 무한한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의미하며, 다시 사명 받아서 끝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다가 내 앞에 오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참된 용서란 무한한 십자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목사가 24,000명, 바리새인과 수많은 서기관, 장로, 유사,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래침 뱉고, 주먹질하며 욕했습니다(시 22편).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오늘까지 삶도 모두 다 예수님을 부인한 삶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아침 부활하셔서 아침 식사에 초대해 주셨고, 우리와 함께 먹으면서 그 사랑을 다시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라는 말씀은 나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예정 받고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주님의 부활과 생명을 믿는다면 나만 믿을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 친척들, 형제들, 내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에게 먼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방 나라들과 이 세상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축복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나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알려 주는 신령한 천국 편지의 배달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부터 주와 같이 출발하고 주와 같이 진행하고 주와 같이 마치며 그 결과 하나님께 감사기도로서 보고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188장(새찬송가 494장), 만세 반석 열리니>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 없이 힘 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주소서
  4.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아멘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기에,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며 우리의 영생입니다.

얼마나 큰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쓴다면 절대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 사랑한다면 나를 위해서 몸을 바치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 “나는 너 위해 죽었으니 너는 뜻을 위해 살아야 될 거 아니냐?”
두 번째, “내가 너를 용서했다”
세 번째, “내 나라 유업을 받고 내 양을 잘 돌보라”

오늘, 부활의 아침에 갈릴리 해변으로 초대해 주셔서, 우리가 모두 조반을 먹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령한 말씀의 뜻을 깨닫고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했습니다(골 1:24). 여러분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대신 걸머지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삶 되시기를,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넉넉히 그 나라에 입성하시는 귀한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찬란한 부활의 아침에 모든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리겠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내가 채우겠다 결심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3절 말씀을 볼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 모든 보화가 감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친히 숯불을 준비하시고 고기를 준비하시고 떡을 준비하셔서 “같이 와서 조반을 먹자” 초대해 주시니 우리는 ‘아멘’ 하고 달려가서 주와 같이 조반을 먹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 때 주와 동행하고 주와 출발하고, 주와 진행하고 주와 같이 마치는 삶이 되어, 끝까지 믿음이 약해지지 않는 산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예수만 확실히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그것처럼 우리들의 믿음 보시고 저희를 향해서 기뻐하는 역사가 부활의 아침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복된 큰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빌고 원할 때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006년 4월 16일 주일 2부(부활주일)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 설교 중

 

  • 2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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