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이 소제물이 되기까지 – 사순절의 단상(斷想)
알곡이 소제물이 되기까지
사순절의 단상(斷想)
요엘서 1장은 메뚜기떼로 인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모두 사라진 황폐한 시대상을 보여 준다. 그 결과 여호와의 성전에서 소제와 전제도 끊어졌다(욜 1:9, 2:14). 하나님께서는 황폐한 시대보다 더 이상 하나님께 올라오지 않는 백성의 삶을 더 가슴 아파하셨다. 그래서 요엘서 2장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다.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 하나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신 것은 단순한 풍년이 아니라 예배였고, 무너진 형식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였으며, 제사의 재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자체였다(욜 2:13).
소제는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 곡식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이 자기 삶의 수고와 결실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서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 바로 소제다. 그러므로 소제가 사라졌다는 것은 제사 하나가 줄어든 정도가 아니다. “내 삶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던 고백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레위기 2장을 보면 소제는 고운 가루로 드려진다. 밭에서 거둔 것을 그대로 올려놓는 것이 아니다. 곡식이 있어야 하고, 그 곡식은 알곡이어야 하며, 그 알곡은 다시 갈리고 걸러져야 한다. 그러니 소제의 시작은 결국 알곡이다. 알곡은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차오른 열매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말씀이 차오르고, 회개가 차오르고, 순종이 차오르고,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차올라야 한다. 그 진심의 무게가 묵직해서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쉽게 날아가지 않는 신앙, 그것이 영적 알곡이 아니겠는가?
그 반대편에 쭉정이가 있다. 쭉정이는 언뜻 보면 알곡과 크게 다르지 않다. 껍데기도 있고, 자리도 있다. 다만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비어 있거나 자라다 말라 버린 것이다. 영적으로도 그렇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수려한 언어로 기도하고, 봉사의 자리에도 자주 보이는 익숙한 얼굴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자라지 않은 상태가 더러 있다. 겉보기에 신앙의 모양은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무게를 잃어버린 상태다. 메뚜기 재앙을 통해서 걸러낸 쭉정이가 바로 요엘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고,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다.
‘쭉정이’라 하면 ‘껍데기’만 남은 상태를 떠올리지만, 한편으로 껍데기 없이는 알곡도 없다. 껍데기가 있어야 알곡이 보호되고, 자라고, 자기 모양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도 그러하다. 예배의 형식으로 거룩을 배우고, 기도의 형식을 갖춤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고 내 뜻을 비우는 순종을 배운다. 몸으로 드리는 헌신, 꾸준한 봉사의 규율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의 필요성을 깨닫고 말씀의 원리를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껍데기’가 구원의 조건일 수는 없지만, 믿음이 자라나는 자리가 되어 주며, 알곡이 되기까지 신앙을 보호해 준다.
문제는 그 안에서 신앙이 자라지 않을 때다. 껍데기 안에 알맹이가 차오르지 않으면, 형식은 점점 두꺼워지고 중심은 점점 가벼워진다. 그렇게 사람은 쭉정이가 된다. 예배를 오래 드려도 하나님 앞에서 떨 줄 모르고, 기도를 많이 해도 자기 뜻밖에 모른 채, 봉사를 꾸준히 해도 결국 자기 만족과 자기 의를 쌓는 일로 남을 수 있다. 형식 안에서 자라야 할 믿음이 멈추어 버린 것이 문제다. 어쩌면 쭉정이는 ‘형식’ 속에 오래 있었는데도 속이 차오르지 않을 때 생긴다. 그래서 더 두렵다. ‘모양’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소제는 알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알곡은 아직 소제물은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껍데기가 벗겨져야 하고, 알곡 자체도 갈려야 하며, 채에 걸러지고 다시 갈리는 과정을 지나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고운 가루가 된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예수님은 형식만 갖춘 분이 아니셨고 (마 15:8-9, 23:23), 중심만 뜨거운 분으로 머무르지도 않으셨다(마 5:17, 참고-약 1:22). 그분은 삶 전체를 아버지께 드리셨다.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으셨고, 순종 속에서 끝까지 자신을 내어놓으셨다(요 6:38). 겟세마네의 기도와 십자가의 순종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마 26:39).
형식 안에서 중심이 자라고, 그 중심마저 하나님의 손 안에서 갈리는 연단을 지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소제다. 사순절을 지내며 소제가 떠올린 단상(斷想)이다.
공석진 전도사
- 26년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