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오.구. 구속사 독후감 당선작
여.기.오.구. 구속사 독후감 당선작
<최우수상>
<구속사 시리즈> 제5권 <영원한 언약의 약속> 전자책을 읽으며…
이번에 <구속사 시리즈> 제5권의 e-book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을 다운 받아 휴대폰으로 틈틈이 읽으며, 주전 605년부터 주전 586년까지 혼란의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전 605년 약 17세의 나이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은 2년 후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여 주고 왕궁에 거하게 된다. 그로부터 약 6년 뒤 주전 597년 제 사장 지파인 에스겔이 25세의 나이로 18세의 여호야긴 왕과 같이 바벨론으로 끌려온다. 계산해 보면 에스겔과 다니엘의 출생 연대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포로로 끌려온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서로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을까?
주전 605년부터 주전 562년까지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 원년 주전 561년에 여호야긴 왕은 54세의 나이에 옥에서 나와 그 머리를 들게 된다. 그리고 에윌므로닥의 통치가 주전 560년에 끝나는 것을 보면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사면하기 위해 왕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호야긴 왕은 사면이 됐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또 에윌므로닥이 1년 만에 느부갓네살의 사위인 네르갈사레셀에게 폐위될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서웠을까?
네르갈사레셀, 나보나이두스에 이어 아들인 벨사살 때에 벽에 글자가 나타나고 겁에 질려 있을 때 태후가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느부갓네살 이후 다니엘은 왕궁의 일에서 점차 떠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벨사살의 마지막 밤은 주전 539년으로 다니엘이 약 83세경일 때이고 약 20년간 왕의 일과 무관하게 있던 83세의 노인 다니엘이 그 글자를 해석해 주고, 바벨론의 멸망을 지켜보고 메대, 바사가 패권을 쥐었을 때, 다니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한 그 메대, 바사의 총리 셋 중에 하나가 되었을 때 다니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또 약 70년의 세월이 지나 바벨론 포로 귀환을 앞둔 이 혼란의 시기에, 그 중심에 살던 사람들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을까?
포로기인 주전 605년부터 주전 586년까지는 “바벨론 왕을 섬기라”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또한 귀환기인 주전 537년부터 주전 444년까지는 “유대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새삼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면 당장이라도 이 말씀이 전 세계로 전파되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이 말씀이 전 세계에 전파될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세상은 전쟁의 소리가 드높고 대한민국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교회는 너무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바벨론 왕을 섬기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바벨론으로 가게 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스스로 바벨론 왕에게 나아갔던 여호야긴 왕은 그 머리를 들게 되었고 그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고, 스룹바벨은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주역이 되었다.
혼란의 때에 어떤 말씀을 붙잡고 어떤 삶을 사는지는 개인의 선택이고 순종이지만, 이때를 어떻게 보내는 것이 이후에 가장 좋은 결과를 낳을 순종이 될지는 모두가 함께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5권을 읽으면서 5권의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나의 삶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순종을 할 것인지를 계속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우수상>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창세기의 족보>를 읽고
처음 창세기에서 족보를 접할 때 이름들이 계속 나열되어 있어서 접하기 어렵게 느껴졌고, 때로는 창세기를 건너뛰어 읽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고, 무작정 이름만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족보>를 읽으면서 이것이 단순한 이름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어지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이 책은 많은 해답을 주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옛날 사건들과 선한 길, 그리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눈물, 열심의 흔적들이 창세기의 족보 속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되어 더욱 흥미롭다 못해 놀라웠다. 또한 창세기의 초점은 경건한 자손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계획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책 속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의 족보 차이였다. 가인 계열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시작된 반면 셋 계열의 족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인 계열은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 되었고, 셋 계열은 아담에서 시작하여 더 나아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갔다. 또한 삶의 방식 측면에서 가인 계열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지만, 셋 계열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에서도 가인 계열은 하나님께서 삶을 인정하시지 않았기에 향수 연도가 기록되지 않은 반면 셋 계열의 족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었기에 “낳았고 지내며 향수하고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거기에 셋 계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기에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 족보는 단순한 이름의 기록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족보 속에는 각 세대의 삶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경 전체를 더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족보 속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이 담겨 있다는 사실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나열된 이름처럼 보였던 족보가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의 차이를 바라보며 지금의 나 역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또 믿음의 족장들처럼 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하여 그곳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앞으로는 경건함으로 구별된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 셋 계열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호 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고 싶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된 삶
(<구속사 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를 읽고)
올해 초 새신자 교육을 마치며 진행된 인터뷰에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왜 인간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가?” 이것은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구속사 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을 통해 역사는 그저 흘러갔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깃든 시간이요, 오늘날 나의 삶을 비추는 기준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특별히 아담 이후 이어지는 두 계열의 족보는 인간의 선택에 따라 어떻게 다른 역사로 갈라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가인의 계열은 인간 중심의 확장과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성을 쌓고 문화를 이루며 겉으로는 성장해 가지만, 그 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절대화하며 하늘에 닿고자 했던 바벨탑 사건은 결국 언어의 혼란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오늘날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커질수록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은 오히려 좁아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반면, 셋의 계열은 다른 방향을 보여 준다. 에노스 시대에 기록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신앙은 개인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관계와 공동체의 형태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 계보 가운데 에녹의 삶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앙이 단순한 제도나 습관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 자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후 에녹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사망에 이르지 않고 승천이라는 축복을 얻는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또한 노아 이후 이어지는 셈의 족보를 통해 믿음의 계보가 에벨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혼란 속으로 흐를 때에도, 하나님은 그 흐름 속에 구원의 역사를 남겨 두셨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한편 벨렉 이후 200년대로 인간의 수명이 점차 줄어드는 기록은 단순한 생물학적 변화라기보다, 인간 세계의 죄악과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멀어질수록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며, 점점 축소되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된 존재로 남게 된다는 생각이 너무나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으로 다시 이어진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구속 역사를 다시 시작하셨고, 그 부르심을 통해 믿음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족보는 단순히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여시는 방식이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성경의 역사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이전에는 현실의 기준과 결과 중심의 사고에 더 익숙했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찬송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들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그 변화의 일부였다. 결국 <창세기의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말씀으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
구속사 읽기 캠페인 다독상 수상 18대교구 한영순 권사 인터뷰
<구속사 시리즈> 각 권을 7독 하면 성경에 눈이 뜨인다고 하신 저자의 말씀에 한때 저도 열심을 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태해졌죠. 그러던 중, 참평안지에 어느 권사님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구속사와 성경을 읽으신다는 내용에 감명을 받았어요. ‘아, 나도 새벽에 좀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지 기도도 안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시간에 눈이 떠지는 거예요. 마음과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느껴요. 2시 반에 일어날 때도 있어요. 월요일 구역장 공과 예배와 수, 목, 주일 예배에 참석해 가며 평소에도 읽지만 이렇게 이벤트를 한다고 하니, 더 적극적으로 힘을 내어 짬짬이 읽었죠(웃음). <창세기 족보>는 얇으니까 하루에 1독 해요. 500쪽이 넘는 건 이틀이나 이틀 반에 걸쳐서 읽죠. 남편이 은퇴를 한 뒤로부터는 밥 시간에 많이 얽매이지 않아서 좋아요.
성경이나 구속사 읽기는 시간이 많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구속사 읽기에 가속도가 붙은 건 교회에 어려움이 본격화된 이후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신앙생활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앞으로는 각자 알아서 대처해야 하고 말씀으로 분별력을 키우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아야 분별하고 대처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구속사 시리즈>를 읽다 보니 사람들의 행동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성경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 걸 발견하게 되니 더욱 책에 빠질 수밖에 없고, 재미있어지니 자꾸 더 읽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설교 때 주셨던 말씀도 함께 떠오르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성경과 구속사는 정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읽지 못하는 책이라고 하신 게 생각나요.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으려면 심비(心碑)에 새겨야 하고 영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어야죠. 백내장 수술을 해서 장시간 독서를 하면 눈이 뻑뻑해지고 기억력도 점점 흐려져 가지만 그루터기로 남으려면 생명이 있는 한 순종해야겠지요. 말씀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년 2부 <그루터기 선교회>에서는 1독을 했을 뿐인 한 청년의 소감이 눈길을 끌었다.
“구속사 읽기 캠페인을 한다고 했을 때 ‘이거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신앙의 공동체가 무엇인가 하자고 할 때 동참하는 것이 설령 중단하더라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발전이 있겠다 싶어 시작했고, 결국 1독을 했어요. 과거에 <구속사 시리즈>를 읽을 때 밑줄을 치곤 했는데 과거 밑줄 쳤던 글을 다시 읽게 되면서 ‘아, 예전에는 이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었구나’ 기억이 나더라고요. 오늘 밑줄 친 것은 오늘의 은혜에 더해 미래에 확인이 되면서 또 은혜를 받겠지요. 성경 읽기, 구속사 읽기는 나에게 주신 과거, 현재, 미래의 은혜를 담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것을 반복해 읽는 것은 그때마다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복된 자리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권오연 기자
2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