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2
기도문
어느 청각 장애인이 인공와우 수술 후 70년 만에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스토리의 영상을 시청했다. 수술 후 ‘소리’라는 음은 들을 수 있지만 그 언어를 이해하는 데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성경책을 열독하는 어느 분과 마주 하고 앉았다.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부흥회를좇아 다니고, 성경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성경을 읽으면 답답할 때가 많았다. 문자적인 표면만 읽어 내려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성령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 열어 주시고 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막연히 느끼고 있던 중에 평강제일교회로 부르심 받아 성경공부를 차근차근 하게 되었다. 까막눈 같았던 눈이 밝아졌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았는데 문제는 경기도 안성에서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는 교회가 너무 멀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이 말씀 앞으로 인도하여 좀더 편하게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른 시일 안에 가나안을 체험하고 싶었었다.
나를 인도했던 분에게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박윤식 원로목사님께 기도문을 써서 기도를 부탁드리자 했다. 얼른 기도문을 작성했다.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교회가 있는 오류동이나 근거리인 부천까지만이라도 오게 해달라고 구구절절이 적었다.
싸인펜으로 굵직하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성경 구절을 큼직하게 쓰고, 괄호하고 시편 65:4까지 친절히 썼다. 이때까지도 목사님께서 성경을 1,800독 하셨다는 말을 듣기 전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목사님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렸으니 단기간에 소원을 이룰것이라 기대했는데 무소식이었다. 수많은 기도문 중에 ‘내 기도문을 보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설교 말씀 중에도 “여러분들이 평생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제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 나라 가보면 알게 됩니다.” 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당연히 읽어보시고 기도해 주셨을꺼야’ 하다가도 돌아서면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후 평택, 오산 등으로 이사를 다녔고 딱 한번, 교회에 근접한 부평까지 왔으나 8개월을 살고 다시 평택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사람의 진행과 생각으로는 안되는구나.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물리적인 장막집 이동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고, 어디에 살든지 우리 가족이 말씀의 끈은 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강원도 원주까지 가게 되었지만 토요일마다 교회까지 와서 성가 연습하고 올라가기를 4년, 드디어 22년만에 그토록 바라던 교회 근처인 부천으로 장막집을 옮기게 해 주셨다.
부천, 부평은 남편도 나도 결혼전 각자 30년을 살았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때는 평강제일교회로 불러주시지 않다가 두시간 반이나 소요되는 안성에 가서야 만나게된 말씀의 교회. 그래도 불러 주신 게 어디인가. 물리적인 거리보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마음의 거리가 더 중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섭리였을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광야 노정가를 부를 때마다 그동안 열 번 넘게 이사 다닌 때와 장소를 떠올리며 뭉클해지곤 한다. 우리 가족을 독수리 날개 등에 업어 지금까지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게 된 건 전적으로 은혜임을 고백한다. 성전과의 물리적인 거리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시려는 섭리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 가정을 말씀의 교회의 날개 아래 품어 주시고 부르셔서 심으셨으니 뽑고 헐지 아니하시기를, 그리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장막집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생전 박윤식 원로목사님이 거주하시던 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늘 궁금했었다. 목사님이 쓰시던 책상 어느 서랍 속에, 22년 전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써 내려간 그 기도문은 아직 남아 있을까. 그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각 가정마다 만나를 보관하라고 하셨었던 것처럼 빛바랜 그 ‘기도문’도 우리 가정에 기념물로 지정하고 싶다.
글_권오연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