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교회 개척의 시작 : 시온산한돌교회와 일석교회
숫자로 보는
박윤식 원로목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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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의 시작:
시온산한돌교회와 일석교회
박윤식 원로목사는 1958년 동마산감리교회 서리 전도사로 성역(聖役)을 시작했다.
6·25전쟁이 휴전한지 불과 5년, 전후(戰後)의 피폐한 상황은 젊은 목회자에게는 더욱 힘든 것이었다. 이름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한 달에 15,000~17,000원, 대형교회는 30,000원 쯤 사역비를 받을 때, 박윤식 전도사가 받았던 사역비는 고작 2,200원이었다. 빈민들을 위한 배급인 쌀 소두 한 말로는 한 달을 지낼 수 없었고, 소 여물에 쓰이는 옥수수 가루를 끓여 만든 강냉이죽 배급이 있었지만, 목회자가 성도들 사이에서 배급을 받아 먹기도 여간 곤혹스러운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상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틀을 굶고 심방을 갔는데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수돗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려는데 개밥통에 하얀 쌀밥이 있었습니다. 얼른 수돗물에 씻어 몰래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눈이 밝아져 왔습니다.”라고 박윤식 원로목사는 회고하곤 했다. 그때 몸에 밴 절약의 습관은 지금까지 평강제일교회에서 음식, 전기, 수돗물 등 곳곳마다 낭비를 용납하지 않는 절제와 절약의 정신을 낳았다.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젊은 박윤식 전도사는 벽돌 기계를 구입해 교회 청년 열댓 명과 함께 3개월의 공사 끝에 교회 건물을 짓기도 했다.
▲ 교회 개척 전, 천막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이 후 3년 6개월 7일 동안 지리산 산상기도를 마친 박윤식 원로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장로교로 교단을 옮기고, 서울에서 성도 4명의 가정교회로 목회를 재개했다. 밤이면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낮에는 후암동, 종로, 효자동 등의 성도들 집으로 찾아가 성경을 가르쳤다. 성도들이 낮이면 성경을 배우기 위해 한 곳에 모였던 것이다. “일단 성경공부를 하고 가면 그 사람들을 통해 다시 몇 사람이 전도돼 오고, 줄에 줄을 이어서 왔지요.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은 와서 듣고는 성경 말씀을 사모해 모이고 또 모였습니다. 공부하고 나면 여유 있는 사람들이 쌀을 가져와서 같이 밥도 지어 먹고, 또 은혜를 받았으니 산에 가서 철야기도 하고, 그리고 아침이면 또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어요.” (이인애 권사의 증언)
전도사 한 명, 집사 한 명씩 짝을 지어서 15명을 전국에 전도하라고 내려 보내기도 했다.
“박윤식 목사님이 전도 결과를 너무 궁금해 하니까, 어디서 어떻게 전도를 하고 있고 누구를 만났다는 내용을 적어서 엽서를 수시로 부치기도 했지요. 어떤 분들은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걷고 있습니다.’라고 썼어요. 박 목사님이 그때는 무서웠어요.” (여운초 목사의 증언)
여운초 목사, 전극화 선교사, 홍순분 전도사, 이영숙 전도사, 이범례 전도사, 이정희 권사, 이인애 권사 등이 당시의 주역들이다.
▲ 일석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으로 교회는 곧 포화상태에 달했다.
1969년 9월 10일 서울 대방동에 시온산한돌교회를 개척했다. 100여 명이 끼어 앉는 성전이었다. 1971년 11월 15일에는 서울 신림동에 건평 200평의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일석교회(一石敎會)로 교회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미 박윤식 목사의 성경공부가 유명해져서 ‘서울 장안에 성경 말씀 사모한다는 사람은 한 번씩 다 다녀갔을’ 정도였다. 공부가 길어져도 더하자고 했지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사야 28:16은 시온에 둔 ‘한 돌’을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한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급절(急切)함이 없다. 다니엘 2:45에서는 ‘뜨인 돌’이 느부갓네살의 신상을 무너뜨리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오직 예수’의 한 돌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은혜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을 반드시, 그리고 완전히 이기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