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소망
2025.07.19
롬 8:24-25
(제25-29호)
위대한 소망
롬 8:24-25
신앙생활 가운데 성도의 소망은 볼 수 있는(=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불가시적인) 것입니다(롬 8:24). 그렇기에 소망이 있는 성도라면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살전 1:3). 위대한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며,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위대한 소망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1. 성도의 위대한 소망은 조금도 절망하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소망이 없으면 절망밖에 없습니다. 절망이란 소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개인의 소망이 끊어지면 그 개인은 끝나게 되고, 사회가 소망이 끊어지면 그 사회도 끝나게 됩니다. 절망처럼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물질적 절망이나 정신적인 절망은 누구든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신앙적인 절망은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창 6:5-7을 볼 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노아 당시의 절망적인 사회상을 눈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했다는 말은 단순히 죄악이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노아 때가 세상 곳곳에 죄악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 시대에 성도가 사는 길은 조금도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악 된 세상을 살면서 성도로서 소망을 품는 것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소망을 품은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소망을 품은 성도는 조금도 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도의 위대한 소망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신앙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도의 절망은 말씀을 듣지 못할 때 생깁니다. 롬 10:17을 볼 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을 듣지 못하는 생활을 한다면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방주를 지었기 때문에 훌륭하게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 요 5:17을 볼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홍수 심판에 대비하여 거대한 방주를 짓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조금도 어김없이 방주 짓는 일을 진행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의 크기나 구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준행하였습니다(창 6:22, 7:5).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방주를 짓지 않았다고 가상해 봅시다. 노아가 정성을 다하지 않고 방주를 대강대강 지었다면, 구멍이 생기게 되어 물이 스며들어 방주가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믿음이 빈틈이 없는 믿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빈틈이 없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위대한 소망은 영원한 삶에 대한 각성(覺城)으로부터 나옵니다.
창 6:9을 볼 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노아는 영원한 삶에 대하여 각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여 절망적인 시대라고 해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없어지지 않으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밤은 매우 절망적인 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마 26:40-41). 이 말씀처럼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롬 13:11을 볼 때,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저버리기가 쉽습니다. 어두움의 권세에 휘말려 죽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항상 위대한 믿음의 소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요 16:33을 볼 때,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위대한 소망은 영원한 삶에 대한 각성이 있게 합니다.
결론. 위대한 소망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연약합니다. 때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이같이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일 때, 붙잡아야 할 말씀이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골 3:1-2을 볼 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낙심이 될 때, 우리가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위대한 소망이 생기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절망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믿지 못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맙시다. 전도서 기자는 땅에서의 모든 일이 아무리 좋아도 ‘헛되다’고 말씀하였습니다(전 1:2-3). 그러나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성도에게는 절대 절망이 없고, 위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