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국내외 선교의 역사_국내 선교
국내외
선교의 역사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서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전파하며… 가르치되”(행8:30-31)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6:7)”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9:31)”
박윤식 원로목사의 선교 사역은 사도행전의 구절들을 통해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된다. ‘땅끝까지 복음 전파’라는 위대한 비전을 품은 사도 바울이 셋집에서 ‘가르치기’를 근간으로 그 선교사역을 완수했듯, ‘성경공부’는 박 원로목사의 선교사역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50여년 구속사의 말씀은 점점 왕성해갔고,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오늘에 이르렀다.
국내 선교
평강제일교회의 시작은 ‘서울 홍제동 산꼭대기’라고도 하고 ‘원효로’거나 ‘후암동’이라고도 한다. ‘천막예배’ 또는 ‘가정예배’로 시작해 오늘날 평강제일교회로 이어진 장소들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대방동’, ‘용산시장’, ‘봉천동 꼭대 ’역시 평강제일교회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박윤식 원로목사는 상경했지만 아무 연고가 없었다. 전국을 순회하며노방전도도 다녔고 삼각산, 무악산 등에서 열리던 기도회나 부흥집회에 찾아가 나무를 하고 불을 때주는 등 행사를 돕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만났다. 예배와 성경 공부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성도들의 세 사는 마당 천막에서, 좁은 방에서, 주인집 차고에서, 때와 장소는 따로 없어도 늘 예배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드려졌다.
예배와 공부가 끝나고 국수라도 끓여먹기도 했지만, 점심은 굶을 때가 훨씬 많았다. “많이 굶으셨다.”는 표현은 초기 성도들이 당시를 회고할 때마다 추임새처럼 사용되곤 한다. 궁핍과 굶주림은 초기 선교사역에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와도 같았다. 박윤식 원로목사는 동마산교회에서의 첫 월 사역비를 2,200원으로 회고했다.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월 30,000원 가량의 사역비를 지급했고,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진 목회자들은 15,000~17,000원 정도를 받던 때였다.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두었던 박 원로목사도 빈민들을 위한 배급 행렬에 서야했다. 목회자 신분으로 성도들 사이에서 배식을 받아야 하는 일 또한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방을 다니다가 “개밥그릇에 담긴 밥을 씻어 몰래 화장실에서 먹고 허기를 면한 적도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혹독한 산상 기도를 끝내고 서울에 와서도 만 하루이상을 굶는 일은 다반사였고 늘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돈이 생기면 선교 확장의 비전을 품고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경을 가르쳤다. 지리산에서 깨달은 말씀을 듣고는 ‘마치 사진첩을 보고 설명하는 듯한 성경 말씀’으로 표현한 성도도 있다. 초기 성경공부 시절에는 치유의 기적이 많았다. 보통 치유의 기적은 ‘부흥성회에서’, ‘안수 받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인식돼있던 터라, 말씀을 배울 때 겪은 치유의 경험은 특별하게 회자됐다.

▲ 2011년 미 LA 수정교회에서 열린 구속사 세미나
훈련받은 성도들은 말씀의 전달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교회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박 원로목사는 둘씩 짝을 지어 전국 각지로 내려보냈다. 전도인들은 지방의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달했고 ‘성경을 알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달되면 박 원로목사는 불원천리 현장으로 달려가 멍석을 깔고도 몇 시간씩 성경을 가르쳤다.
전국 각지 지금의 지교회들은 대형교회로 성장한 평강제일교회의 물적 지원에 힘입어 마련된 것이 아니다. 서울에 본교회가 태동하기도 전 어렵던 시절, 박윤식 원로목사와 그의 동역자들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가꾸고 성장시킨 것이다. 지교회들이 당시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이후 순차적으로 지교회들이 설립되는 과정에 당시 말씀을 받았던 성도들이 기둥 같은 역할을 했던 일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박윤식 원로목사의 거처는 평생, 교회였다.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 때까지는 공간이 없었으나 「일석교회」 이후부터는 교회에서 머물렀으며,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처한 곳도 평강제일교회내 옛 군부대 막사(평강제일교회는 옛 공군부대 부지에 건축됐음)였다. 박윤식 원로목사는 교회 초기 1인다역(一人多役)을 해냈다. 주보제작부터 건물 경비까지 그의 몫이었다. 박 원로목사의 선교사역은 쉬거나 멈춰선 적이 없다. 그의 동역자들과 성도들은 이 모든 사역의 생생한 증인이요, 목격자이다. 동역자·성도들과 함께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성전과 기도원을 건축해나갔고, 개·보수했다.
2007년부터 발간된 구속사 시리즈는 선교의 신기원을 열었다. 초기 6개월에 한 권 꼴로 시리즈가 출간되면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뒤에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한국 최고 명망을 갖춘 신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박윤식 원로목사의 이단 조작 시비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신학계를 대표해 나선 끝에 2013년 12월에는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처음부터 이단이 아니었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구속사 시리즈는 신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지 오래며, 구속사 시리즈 출간 이후 ‘그간 오해해서 미안했다’는 내용의 목회자들의 편지와 전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교회 내에 ‘30년 가까이 집요하게 진행된 이단 조작 시비를 교계에서의 정치 행위 없이, 어떻게 난관을 돌파할 것인가’하는 걱정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성도들은 ‘오직 말씀’으로 그것이 가능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