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굶주림과 인간의 평화
하나님의 굶주림과
인간의 평화
마태복음 2:1-23, 4:2, 21:18, 마가복음 11:12, 요한복음 4:6-7
휘선설교집 제3권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성탄」에서 재수록
1995년 이 한 해가 다 가기 전, 오늘 거룩한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백화점의 진열장마다 크리스마스트리들이 장식되고, 거리에는 각종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요란스럽기만 합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조용히 보내자는 구호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탄의 무드(mood)는 어쩔 수 없이 민심을 들뜨게 합니다. 징글벨 소리에 맞춰 즐거워하는 도시인들의 크리스마스 축제와는 달리,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는 서글픈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탄의 시작점의 역사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를 정비하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굶주림과 인간의 평화’, 즉 ‘예수님의 굶주림과 인간의 평화’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즉 예수님이 배고파 굶주리고 있느냐?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태어난 선지자 세례 요한마저 순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마 11:6). 친척들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쫓아다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하도 지나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욕을 하니까, 한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복(同腹:한 배에서 남)동생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57-58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가복음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마가복음 3:31-35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요한복음 7:3-5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 부르기 전에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괴로움, 하나님의 굶주림, 배고픔을 먼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굶주림에서 성탄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7을 볼 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있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를 담아 두는 나무로 된 밥통입니다. 여러분이나 친척 중에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개나 소나 말이나 어떠한 짐승의 밥통에 아기를 낳아서 강보에 싸서 두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이 낳은 어머니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못살아도 골방은 있잖아요? 셋방은 있잖아요? 짐승 기르는 곳, 한데(집채의 바깥)입니다. 엄동설한에 얼마나 춥겠습니까? 남 얘기 듣듯이 하지 마세요. 사관(舍館)이 없어서 짐승의 밥통에 뉘어 있는 하나님! 창조주, 영생의 주,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배고픔만 있을 따름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바로 이 배고파 우는 굶주림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씹어 보지 못한 자는 인생의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굶주린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배부른 자, 성공한 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서 비천한 위치에 스스로 처해서(빌 2:7-8), 서럽게도 굶주림에 젖을 빠는 갓난아기에 대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를 낳아서 길러 보세요. 장성할수록 철이 들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고 눈치가 있어야 됩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예수 믿은 지가 몇 년입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의 뜻을 깊이 깨닫고 참된 성탄 축제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사야 53:1-12 말씀을 보세요. 배고파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 제한받게 됐다는 것, 굶주림을 경험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생명에 대한 굶주림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오셨습니다. 굶주림 없이 생명의 배부름을 사모할 수가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한 성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로 오신 분입니다(요 1:14). 하나님이 배고픈 어린애가 되어 인간에게 오셔서 젖을 찾습니다. 여러분, 젖병을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젖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6:27-58 말씀을 절대 잊지 마세요. 마태복음 9:35-38 말씀을 볼 때, 영혼이 굶주린 인간에게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젖을 먹일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9:35-38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여우도 굴이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배고픔에 부르짖는 절규의 소리입니다. 마태복음 8:20 말씀 잊지 마세요. 수십 년 예수 믿으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불러왔지만, 하나님의 배고픔을 깨닫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선(善)의 굶주림은 오직 하늘 양식을 받아먹어야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는 오직 하나님의 양식을 사모하고 먹음으로써 얻을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운 것, 배고픈 것은 다 예수께 돌리고, 우리는 편안하게 아무 고통 없이 그저 좋다고 ‘오늘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성탄절인데 빨리 예배당 가자.’ 하겠습니까? 오늘날까지 모르고 그랬다면 용서받지만, 이 말씀을 들은 후로는 그 나라 갈 때까지 먼저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돈해야만 되겠습니다.
성탄은 영혼에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는 축제입니다
참된 생명은 굶주림 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굶주림을 경험하면서 성장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8:1-3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왜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하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믿는지 아니 믿는지, 얼마큼 겸손한지, 얼마큼 말씀을 순종하는지 알기 위해서 광야에 내보내셨던 것입니다.
풍요가 쌓이는 곳에 우상의 꽃이 피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배부름을 위하여 약자의 몸값을 흥정하는 세상 아닙니까? 아모스 2:6-8이나 욥기 24장에 있죠. 풍요의 창고 속에서 진리는 길거리로 쫓겨나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아모스 2: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욥기 24:2-11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6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8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11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축제는 배고픔의 축제입니다. 권력자에게 눌림을 받는 배고픈 백성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축제를 드려야 합니다. 강자에게 눌림을 받는, 인정에 배고픈 군중은 화해의 촛불을 환하게 밝혀야만 하겠습니다. 영혼이 굶주린,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고요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은 영혼이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할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 아편이 아닙니다. 약자들과 쫓겨난 자들과 눌린 자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 생명의 양식이며, 싸울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제공해 주는 힘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에 곤한 자를 위하여 전도로 영혼의 빵을 주어야 합니다. 신앙의 힘과 능력을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탄절에 지구촌 구석구석, 특히 북한에서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야만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니, 육의 양식을 먹듯 말씀의 양식을 먹고 또 먹어서 영혼의 배부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영혼의 배부름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굶주림도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호화로운 호텔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는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만 원, 수백만 원 들여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배고픔도 모르고, 자기 영혼이 말라 꼬드러져 뼈다귀만 남아 있는 것도 모르고…. 참되고 순수한 크리스마스는 영혼의 굶주림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배부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굶주림이 우리의 배부름이 된다고 했죠? 고린도후서 8:9, 빌립보서 2:6-7 잊지 마세요. 잠언 13:7, 고린도후서 6:10, 요한복음 16:22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잠언 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요한복음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거룩한 성탄절에 우리는 굶주린 자들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배고픈 자를 도와주고 축복해야만 되겠습니다. 1995년에는 각자가 하세요. 목사님 각자, 장로님 각자, 권사・집사님 각자, 여러 성도님들이 각자 굶주린 자를 도와주고 축복하세요. 이 해가 가기 전에 육으로나 영으로 배고파하는 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시기를 바랍니다. 배고픈 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은 죄 중에 큰 죄입니다. 헤롯왕은 굶주린 아기에게 괴로움과 고통만을 더해 주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2장 말씀을 볼 때, 헤롯왕이 동방박사들한테 메시아에게 경배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했죠?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갔습니다. 헤롯왕이 속은 줄을 알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라 할 때, 아기 예수를 낳고 하루도 안 됐습니다.
우리 어머님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해산했는데 누가 미역국도 끓여 주지 않고, 피 걸레도 갖다주지 않고, 탯줄 자르는 도구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애 입힐 배냇저고리도 없이 한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요셉아, 마리아야. 빨리 애굽으로 도망가라! 악한 군주 헤롯왕이 이 아기를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낳은 지 몇 시간 안 돼서 핏덩어리를 안고 피난을 갑니다. 애는 젖 달라고 울죠. 십 리, 이십 리 길입니까? 몇백 리 길을 그 밤중에 도망가는, 피난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해 보세요. 기쁘기만 합니까? 만약 여러분 자녀 가운데 하나가 지금 죽었다면 교회 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 부를 것 같습니까? 조금 모자란 자식이 죽었다 해도, 낳은 부모는 그렇게 못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요셉과 마리아와 만 인간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젖이 나옵니까? 피 걸레도 없이, 간수할 것도 없이 도망가는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배고파 울고 서러워하면서 피난길을 가야 합니까? 저는 이틀 동안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까도 말씀했지만, 우리는 성탄절에 굶주린 자들을 절대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감옥에서, 길거리에서, 빈민굴에서, 실직된 상태에서, 혹은 숨어 있는 골방에서, 눈물로 한숨짓고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하나님의 굶주림을 믿는다면 찾으세요. 지금 서울에서 굶주리며 떠는 것은 서울에도 헤롯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방이나 굶주린 자들이 득실거린다면 그곳에도 헤롯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조국 남쪽과 북쪽에서 헤롯왕과 싸우는 하나님의 굶주림이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피 흘리면서 갈 길을 찾고 있는 자를 보세요. 번뜩이는 칼로 양심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 사랑, 새 생명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는 헤롯왕들을 보세요. 인간의 양심의 배고픔, 자유의 배고픔, 정의와 진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배고픔을 경험했습니다. 마태복음 5:1-16에 기록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배고픔이 있는 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배부름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배고프다고 울고 탄식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배고픔이 있는 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배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굶주림은 결국 독재와 폭력과 부정과 사치와 방종을 용납하지 않고 추방할 것입니다. 굶주림 속에서 진리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탄생할 때에 모든 비진리가 헤롯왕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39, 막 14:32-36).
히브리서 5:7-8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괴롭고 어려운 삶의 시련이 예수님께 엄습해 와도,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굶주림을 체험하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하셨습니다. 여러분, 물병을 가지고 왔습니까? 시편 22:1, 마태복음 27:46-50, 마가복음 15:34-37, 누가복음 23:46을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동방박사들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죠. 페르시아에서 아기 예수 탄생하신 곳까지 3,500리(약 1,400km)입니다. 3개월 정도 걸립니다. 시내에서 교회 한 번 오는데 차가 막혀서 서너 시간 걸리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중간에 되돌아가는 게 낫겠다고요? 그 나라 갈 때까지 다시는 그러한 생각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동방박사들은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맹수들과 강도의 위협을 당하고 일사병 걸리기 일쑤인 사막을 지나 석 달 정도 걸려서 왔습니다. 그런데 세 시간이 그렇게 깁니까? 오늘날까지 모르고 입방아 찧었다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기 전에 회개하고 부르세요. 교회 오기가 그렇게 멀어요? 동방박사들의 신앙을 따르세요. 3,500리를 3개월 동안, 빈손이 아니고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도 아직 못 하고, 고맙다거나 인사도 못 하는 아기 예수, 난 지 몇 시간 안 된 핏덩어리 앞에 와서 절을 하면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9, 11에 분명히 ‘아기’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짐승 우리에서 따뜻한 차가 어디 있겠습니까? 손님 대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탄절에 교회 갔더니 아무것도 안 주더라’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그래도 빵도 주고 뭐 나눠주는데 평강제일교회는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이죠. 없는 게 당연합니다.
참된 배고픔이 있는 곳에 진정한 배부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의 배부름을 희망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비전을 가지세요. 꿈을 꾸세요.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굶주린 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의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입니다
인간은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평화입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물질문명으로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선량한 인간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모래 위에 세워진 성곽과 같이 안전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산과 바다의 오염보다도 인간의 영혼의 오염은 정말 무섭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평화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는 제일 먼저 자연을 소재로 시작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의 별, 양 치는 목자들, 짐승의 구유, 이 모든 소재들이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소박한 것들뿐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연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성의 회복과 평화의 근거는 오직 자연을 통해서, 자연 안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9-20 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돌처럼 굳어지고 차가워지고 딱딱해진 인간의 정서와 심성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해주기 위해서, 크리스마스는 화려한 도시 문명의 바벨탑을 피하여 자연 속에서 고요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자연의 정적(靜寂)은 놀랍고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과의 화답을 뜻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자연 속에 초자연적 힘이 직접 성령을 통해 개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1회적(一回的) 사건에 대한 선포인 것입니다. 단 1회입니다. 2회, 3회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의 속성을 거부한다면 결코 평화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조롱당하고 평화가 찢어진 불안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임하시는 아기 예수께 초점을 맞춰야만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초자연적으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영원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의 조건은 땅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헤롯왕의 횡포와 음모로 인하여 수많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난 지 몇 시간 안 돼서 수난의 길을 떠날 때 얼마나 배고파 울고 있습니까? 생명을 권력으로 억압하려는 악의 뜻은 자연을 역행하며 진리를 거스르는 무질서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헤롯왕을 죽게 하셨습니다(마 2:19).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가 여지없이 진흙탕 속에 파묻히는 무질서 때문에 세상이 갈망하는 참된 평화가 수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도 죄가 있으면서 남을 멸시, 천대하고 가정을 파탄 내는 폭군과 가해자들에 의해서 숱한 폭풍과 같은 박해와 고난을 겪는 거룩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진리가 당하는 아픔을 알고 있습니까? 진리가 당하는 슬픔과 괴로움을 얼마큼 알고 있습니까?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왕의 폭력과 같은 무질서는 오늘도 세계 구석구석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사랑의 새 질서를 가지고 평화로운 새 아침에 우리 교회, 아니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것이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눅 1:38) 하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고백과 순종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 성탄절을 맞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오직 하늘의 뜻에 맡기고 순종했습니다.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을 간구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순진한 목자들에게도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실로 겸손한 마음속에만 가득 차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평화, 축복의 평화가 오늘 왔습니다. 인간은 고귀하고 참신한 이상을 품고 평화와 질서를 추구해 나갈 때 진실한 삶의 기쁨과 만족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데, 무엇 때문에 제 마음이 초조하고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누구도 모르죠. 가슴속에 스며드는 향수(鄕愁)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 선교를 위해 잠시나마 조국을 떠나 내 나라, 내 땅, 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만큼은 하나님의 배고픔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을 꼭 읽으세요. 남자 성도님들, 사모님이 애 낳을 곳이 없고 누가 죽이겠다고 해서 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얼굴과 다리가 퉁퉁 부어 걷지도 못하는데 도망간다고 한번 생각해 본 다음 성탄절을 지키세요. 부모가 남한테 매를 맞고 멸시와 천대와 갖은 조롱을 당하는데 자식들이 진수성찬에 밥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이 어둡고 침울할 때 더욱더 가슴속에서 괴로움이 솟구쳐 나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자신의 반성과 깨달음이 더욱 요구될 뿐입니다. 이제부터 온 국민이 신의(信義)와 겸손한 마음,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애국애족의 지혜를 모은다면 아픈 상처가 극복되고 평화의 비둘기가 푸른 조국 하늘에 훨훨 날 것입니다.
결론
오늘 탄생하신 배고픈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사랑의 안내자요 영원한 인도자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배고픈 아기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영접하세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생의 의욕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가까이해 주시고 안내해 주시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천국의 복락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세요. 끝까지 말씀만을 믿으세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영광,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값없이 구원과 용서의 복을 주시는 은혜의 영광,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진리의 영광. 그 영광을 가지고 찾아오신 독생자의 영광(요 1:14) 속에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2:13부터 꼭 읽으세요. 난 지 몇 시간 안 되었는데 피 걸레도 없습니다. 미역국도 없습니다. 엄동설한에 찬바람은 들어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시간에 문 다 열어 보세요. 아마 춥다고 소리치고 야단일 겁니다. 헤롯왕이 죽이려고 지금 군대 수만 명을 풀었습니다. 당시에 손전등이 있습니까? 불이 있습니까?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배고파 우는 아기 예수, 서러움과 오해와 환난과 눈물과 고통을 당하시는 그분을 보면서 성탄의 큰 은혜를 받으시고 이 한 해 마무리를 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995.12.25.(월) 성탄 예배 휘선(暉宣) 박윤식 목사 설교
- 22년 12월호